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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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리뷰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2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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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와 비판을 집요하게 녹인 소설가의 에세이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책이 일간지 신간 안내 기사와 여러 인터넷 서점 안내 메일에 함께 언급되었다. 노출량을 보니 성공한 신간 마케팅으로 보였다. 책 제목도 특이했지만, 작가의 얼굴 그림을 표지에 내세운 것도 눈길이 가게 만든 디자인이었고. 매대에 놓여있는 책의 제목과 표지만 보더라도 읽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한국 출판사가 작명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생전에 쓴 에세이의 제목이자 그 글이 실린 산문집의 제목이었고. 4월 초 한국에서 나온 이 책은 동명의 그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산문집에서 엄선한 에세이를 엮어 제목만 따온 것이었다. ‘유명 소설가의 수필 선집’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가벼운 책은 아니었다.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않을 일 / 바다출판사

 

제목과 표지 말고도 이 책을 읽게 만드는 매력은 저자의 이력과 글의 장르다. 소설가가 쓴 산문, “미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소설가가 쓴 산문(조선일보, 2018. 4. 7)”이라는. 사실 신문이나 인터넷 서점의 서평에서 저자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천재적 문학성을 언급하고 그의 작품들이 미국 현대문학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얘기하지만, 나는 정작 그가 누군지 모른다. 소설가라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은 없다. 올 4월 이전에는 그의 연설을 정리해서 나온 책이 있을 뿐이었고. 오늘 소개하는 이 책도 그의 산문을 모아 엮은 선집일 뿐이다. 내게 월리스라는 미국 작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은 이 책밖에 없다. 단 한 권이지만 나를 사로잡았다.

월리스는 2.5편의 장편(1편은 미완성)과 3권의 소설집 그리고 3권의 산문집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많지 않은 저술에도 미국 문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는 유명 평론가의 설명보다 내 관심을 사로잡은 건 그가 쓴 산문들이다. 르포, 비평, 서평 분야에서 저자 특유의 위트와 비판을 녹여 ‘집요’하게 썼다고 한 그 ‘집요’가 눈에 들어왔다. 서점 매대에서 살까 말까 간 보려 살짝 읽어 본 글의 뒷부분이 궁금해서, 그 ‘집요’한 서술이 너무 궁금해 주저 없이 구매했다.

 

파격적으로 집요한 글

월리스의 글은 분량부터 파격적이다. 물론 에세이에 분량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매우 길다. 특히 그 글이 실린 곳이 잡지라면. 이 책의 제목이자 카리브해 유람선에서 지낸 일주일간의 르포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국판 책에서 150여 페이지를 차지한다. 이 에세이는 『하퍼스』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두꺼운 사전을 리뷰한 서평인 「권위와 미국 영어의 어법」은 100여 페이지다. 이 글은 최초에 의뢰한 잡지사에선 게재가 거절되었고 다른 잡지사를 통해서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서야 발표될 수 있었다고 한다. 원고지 20매 정도의 서평도 길다고 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분량이다. 물론 사전을 읽고 리뷰할 평론가들이 얼마나 될까마는.

물론 글이 긴 것만으로 파격을 설명할 수는 없다. 월리스가 글을 쓴 집필 방향도 의뢰한 고객의 목적과 동떨어진 파격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가 쓴 르포에서 원고를 의뢰한 곳의 취지와 동떨어진 글이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르포는 작가가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을 그대로 적는 것이지만 의뢰자가 원하는 담백한 설명과 안내를 위한 글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월리스도 담백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느낀 그대로 ‘위트’와 ‘비판’을 담아 ‘집요하게’ 썼다.

월리스는 일주일간의 유람선 생활을 르포로 쓴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않을 일」에서 카리브해의 호화유람선을 기괴한 공간으로 묘사했다. 예를 들면, 배의 이름인 ‘제니스(Zenith, 가장 좋은 절정이라는 은유)’를 ‘네이디어(Nadir, 최악의 바닥이라는 은유)’로 바꾸어 에세이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게 불렀다. 그가 이렇게 표현한 가장 큰 이유는 기계적인 승무원들을 동원하여 행복을 강요하듯이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유람선의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최고급 식단과 다양한 여흥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즐기는 승객들과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들의 규격화된 모습에서 월리스는 불편한 감흥을 느낀 듯했다. 유람선이 승객들을 응석받이처럼 관리하고 그에 부응해 종일 음식과 놀이에 몰두하는 승객들의 모습에서 슬픔을 느꼈고. 대다수가 70대 이상인 승객들이 강요된 행복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하는 모습을 저자는 본 것이다. 그래서 유람선 여행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이라 표현한 걸까. 르포를 의뢰한 잡지사의 의도가 광고주이기도 한 유람선 여행 비판은 아니었을 텐데.

「랍스터를 생각해봐」는 미국 메인주(Maine)의 랍스터 축제를 주제로 어떤 식음료 잡지의 의뢰로 쓴 르포다. 이 글에서 월리스는 ‘동물 윤리’를 논했다. 음식 잡지의 의뢰로 랍스터(음식) 축제를 취재해서 동물 윤리를 논 한 것이다. 다소 충격적인 표현을 했는데 관광객들이 고른 살아있는 랍스터를 커다란 조리기로 즉석에서 요리하는 장면을 다른 지역의 소고기 축제로 치환해서 표현했다. 소들을 줄 세워 그 자리에서 도살하고 즉석에서 구워 먹는 장면으로. 물론 월리스가 축제를 비판한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인간의 모습, 도리와 가치를 얘기하고자 한 것이다. 이 르포를 의뢰한 잡지사 『고메』가 얘기하는 ‘좋은(good)’이라는 가치가 무엇인지 독자인 인간들에게 고민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돋보이는 생생한 묘사

그의 에세이는 묘사가 구체적이다. 구체적이라는 건 자세하고도 길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유람선 르포에서 그가 묵은 객실 묘사만 9페이지가 넘는다. 침대보가 어떤 모양으로 개켜있고 화장실의 거울 크기와 모양, 비누 색깔과 크기 등 친절이 지나치도록 설명을 했다. 이 유람선을 타기 위해 도착한 공항 풍경과 부두에서 대기하는 그 몇 시간도 50여 페이지 넘게 적고 있고. 유람의 마지막 날은 분 단위의 행사를 현재 진행형을 사용해 시계열 방식으로 나열하며 썼다. 그나마 기억에 의존해 쓰는 것이라 간단히 넘어간 거라니 “형식 과잉”이라는 미국 평단의 평가 그대로다.

「톰프슨 아주머니의 풍경」은 2001년 9·11 당일 월리스가 사는 시골 마을의 풍경을 담은 에세이다. 이 글은 참사를 겪은 풍경뿐 아니라 충격받은 사람들의 묘사를 그 마음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표현했다. 담담해 보였지만 충격을 받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보통 미국인들. 진짜 영화 같았던 순간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장면을 마치 영화를 보여주듯 써 내려갔다. 뉴스를 보는 건지 영화를 보는 건지. 두 번째 비행기가 부닥치는 순간을 표현한 대목에서는 읽는 내가 그날의 충격이 생각나 먹먹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는 장면의 흉측한 아름다움이, 그 파란색과 은색과 검은색과 화려한 오렌지색이, 그리고 또 작은 점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화면에 재생되었다.”(296)

이러한 묘사에서 그가 ‘소설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 사건을 목격한 저자가 쓴 ‘논픽션’이지만 사전 정보 없이 읽었으면 소설이라 해도 믿었을 정도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핍진성’이랄까. 너무 생생해 현실 같지 않아 현실 같은.

 

엄청난 분량의 각주

논문이나 보고서, 인문·사회과학 도서 외에서 각주를 본 건 솔직히 처음이다. 물론 문학비평은 그럴 수 있지만, 르포나 인물 기사 등 에세이를 표방한 글에서는 처음이다. 월리스의 각주는 본문 이상의 설명을 담고 있다. 의뢰받은 원고의 방향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각주에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았다. 그래서 각주의 분량이 엄청나다. 깨알 같은 폰트로 여러 페이지를 넘게 차지한 각주가 많다.

특히 의뢰한 고객이나 편집자의 의도와 다르다고 생각할 때 각주를 활용해서 향후 편집될 거까지를 배려한다. 그래도 편집된 본문이 많다고 역자는 설명한다. 여하튼 월리스는 생전에 산문집을 낼 때 모든 본문과 각주를 살려서 편집했고 이 책도 모든 각주를 살렸다. 이 각주들의 표현을 보면 월리스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위트’ ‘비판’ ‘집요’. 그래도 재미있다. 각주를 이렇게 열심히 읽어본 책은 처음이었다.

테니스선수 ‘페더러’에 관한 에세이 「페더러, 육체적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에 나온 각주가 최고다. 이 글의 원래 제목은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페더러」였다. 모두가 질 거로 생각했던 순간에 ‘페더러’만이 할 수 있는 플레이로 역전시키는 순간을 ‘페더러 순간’이라 명명하며 약 10초간 벌어진 랠리를 여러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며 아래처럼 각주로 보충 설명한다. 이런 각주가 여럿이다.

“이것은 간단히 계산하기 위해서 공이 일직선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한 경우다. 그러니까 내 계산이 틀렸다고 편지를 보내거나 하진 마시라. 서브가 튀는 것을 고려하여 비직각삼각형에서 짧은 두 변의 합으로 움직인 총 거리를 계산하고 싶다면 아무쪼록 계산하시라.” (p.382)

심지어 각주의 각주까지 있기도 하다. 다음은 위 각주에 달린 각주다.

“공이 느리게 튀는 코트 표면일수록 궤적이 직각삼각형에 가까워진다. 공이 빨리 튀는 잔디 코트에서는 각도가 늘 빗각이다.” (p. 382)

 

 

▲ 영문 원서 표지

 

강박 혹은 작가의식

월리스는 그의 르포에서 ‘예비 저널리스트’라는 용어로 자신을 표현했다. 현재 전업 저널리스트는 아니지만, 의뢰받은 주제로 취재한 글이 향후 저널에 게재될 거라는 본인의 신분을 명확하게 정의(定義)한 것이다. 저널리스트 역할은 할 거지만 현재의 신분은 그렇지 않다는 그의 강박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은 그가 쓴 서평과 비평문들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 영어 문법사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현대 미국 영어 어법 사전』의 서평인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을 읽어보면 그의 글 특히 ‘어법’에 대한 강박을 잘 알 수 있다. 월리스가 가진 ‘미국식 영어 어법’에 관한 매니아적 관심과 지식을 잘 보여주는 서평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전(dictionary)을 위한 리뷰라니! 꼼꼼히 읽고 분석한 그의 강박과 집요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 ‘카프카’와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비평문들과 ‘현대 픽션’에 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서 월리스의 작가적 고민을 읽어볼 수 있다. 그는 논란을 일으키는 비평가였으며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싶어 한 작가이자 선생이었다. 이런 글들의 여백에는 대문호의 연장선에 서고 싶어 한 욕망도 보인다.

책 마지막에 실린 「재미의 본질」이라는 짧은 글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요약하면 ‘글쓰기는 글재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을 진솔하고 집요하게 써 나가는 것이다. 글쓰기의 재미는 거기에 있다’라는 ‘글쓰기 철학’.

많이 들어봄 직한 평범한 조언이지만 월리스의 책을 읽은 뒤라 그의 진정성이 확 다가온다. 월리스가 쓴 2.5권의 소설이 번역되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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