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제도 실체를 드러낸 고령 가야고분군
상태바
순장제도 실체를 드러낸 고령 가야고분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3.18 1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을 제조한 고대문명국…이웃국가가 철강기술 배우면서 역전

 

경북 고령군 고령읍은 2015년 4월 대가야읍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읍의 주산은 주산(主山)이다.

대가야읍 주산 자락을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에 아기자기한 고분군이 널려 있다. 무려 200개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고분의 크기는 지름 20m 정도 큰 것들이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 지름 10m짜리 작은 것들이 즐비하다.

발굴은 일제시대부터 진행되어 왔다. 일본 고대사서인 「일본서기」에 가야가 마치 자기네 왕조의 식민지 정도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일본 사학자들의 관심이 많았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고분이다. 「삼국사기」에 진흥왕 23년(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는 기록이 있다.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조에도 대가야 멸망의 기사가 나온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가야(加耶)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군대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공훈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즉시 모두 놓아주어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에 있는 불모지만을 청할 따름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엔 신라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전공기록만 나오고, 대가야의 속사정에 대한 얘기는 없다.

 

▲ 대가야의 제철로 모형 /사진=김인영

 

사서에 사라진 대가야의 스토리가 무덤에서 드러나고 있다.

대가야는 철(鐵)의 나라였다. 지산동 고분군 앞에 제철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대가야의 철 생산 기술을 알아보기 위해 고대의 방법으로 제철로를 만들어 실험한 것이다.

2005년 5월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고대 철생산 유적 주변에서 철광석을 채취해 참나무 숯과 함께 넣고 12시간 이상을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 넣어 철광석을 녹여 냈다. 그 결과, 철이 만들어졌고, 유리와 같은 찌꺼기도 흘러 나왔다.

고령과 인접한 경남 합천군에는 야로면(冶爐面)이라는 지명이 있다. 철을 녹여 내던 로(爐)가 있었던 곳이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소설가 김훈은 소설 「현의 노래」에서 대장장이 야로를 이 지명에서 따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 대가야박물관 /사진=김인영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합동으로 대형분 2기(제44·45호분)를, 1978년 계명대학교가 중형분 4기(제32∼35호분)를 발굴 조사했다.

무덤을 파헤쳐 가야인들의 삶을 보니, 지배계급의 무덤에 주인을 위해 하인들이 생매장된 순장무덤임이 밝혀졌다. 고대 가야 사회의 순장제도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지산동 44호, 45호 고분에는 남녀,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지배자가 죽었을 때 함께 생매장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면 순장당한 하인들은 마지못해 죽었을까. 김훈은 소설 「현의 노래」에서 궁녀 ‘아라’가 궁궐에 들어가 순장을 거부하며 도망치는 모습을 설정했다. 모시는 분의 죽음과 함께 하기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는 김훈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지산동 고분 모형도의 해설사는 달리 설명한다. 그는 “가야 시대에는 내세를 믿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순장에 임했다”고 말했다. 발굴된 순장자들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미신적 종교가 무서운 것이다. 집단자살을 하는 광신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버지와 딸이 편안하게 누워 내세를 기다리는 모습, 이 것이 고대 가야의 순장이었다.

순장제도는 비인간적인 제도다. 신라는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가는 지증왕 3년(502년)에 순장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50년후 신라는 대가야를 멸하고 합병한다. 나라가 망할때까지 순장제도를 유지했으니, 가야는 정체된 나라였고 신라에 먹힐 수밖에 없었다.

고령지역에는 대체로 면 단위마다 봉토분이 밀집한 고분군이 산재하는데, 지산동 고분군이 중심고분군을 형성한다고 한다.

 

김해의 금관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앞서 철을 생산하고 철기문화를 형성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도 나온다.

 

“나라(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얻어갔다. 장사를 지낼때는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철이 두 군(낙랑과 대방)에 공급된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은 금관가야로 비정되는데, 최근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대가야도 철을 생산한 것이 입증된다.

그러면 왜 앞선 철기문화를 향유한 금관가야,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차례로 복속되었을까. 지금까지의 학설은 가야가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연맹체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 김수로왕 시절에 금관가야는 신라보다 더 강력한 나라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그렇게 서술한다. 하지만 신라가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고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가야는 신라에 복속하게 된다.

철의 기술이 신라와 백제에도 전파되고, 가야의 철 독점권이 무너지게 된다. 가야는 철 제조법을 배워 새로운 강자로 부상된 나라에 먹히게 된 것이다.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김인영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김인영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김인영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김인영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사진=김인영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