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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에 드러난 추악한 군상들…「산성일기」

기사승인 2018.03.16  17: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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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침공을 파악치 못한 도원수, 자기 가족만 챙기는 영의정 등

 

1636년 12월 14일에서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8일간, 조선 16대 인조 임금은 만주족 청(淸)나라 군대에 쫓겨 남한산성에 피난해 있었다. 그때 신료중의 한 사람이 매일 일지를 기록해 남겨 두었는데, 그 책자가 「산성일기」(山城日記)다.

한글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자어가 많고 고어로 되어 있어 현대적 표기법으로의 번역이 필요하다. 해석본을 읽어보았다. (김광순 옮김, 2004년 서해문집 발행)

「산성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은 거의 정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관리들의 이름과 직책, 당시 국서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점 등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 남한산성 행궁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참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토록 판단력이 부족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인조반정의 주인공 김자점(金自點)이 병자호란 직전에 군총사령관 격인 도원수가 되어 한 행동이다.

 

김자점이 도원수가 되어 말하기를,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하였다. 혹 도적이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화를 낼 뿐, 성을 지킬 군사를 조금도 더하지 않았다.

“의주 저편 용골산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나리라” 하여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황해도 봉산)까지만 (봉화 불빛이) 오도록 하였다.

납월(병자년 음력 12월) 초6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올렸으나, 자점이 말하였다.

"필시 사신을 맞이하는 불이다. 어찌 도적이 올 리 있으리오.“

초 9일에 비로서 군관 신용을 의주로 보내에 적병을 탐지하였다. 신용이 순안(평양 서쪽)에 이르러 보니 적병이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달려와서 보고하자 자점이 크게 노하여 신용을 베려고 했는데,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서 경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 같이 하고 번신(藩臣)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가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청군이 침공한지 6일 후에야 도원수 김자점이 위세가 급한줄 알았다는 얘기다. 이 정도의 군 책임자라면 당연히 사형시켜야 마땅하다. 병자호란 후에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김자점은 1년동안 유배갔다가 조정에 복귀했다. 인조를 임금으로 만들어준 반정의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까지 오른다.

 

또다른 반정공신으로 병자호란때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김류(金瑬)라는 자의 얘기도 「산성일기」에 나온다.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청군이 퇴각할 무렵이다.

 

김류의 첩과 딸이 포로로 된 일로, 김류가 용골대에게 일렀다.

“만일 포로에서 빼어낸다면 당당히 천금을 주리라.”

이로부터 포로가 된 사람의 값이 중해졌으며, 이는 김류의 말 때문이었다.

용골대 등이 나갈 때 두 대신이 뜰에 내려섰다. 그런데 김류가 문득 정명수를 안고 귀에 대고 말했다.

“이제 판사(判事)와 함께 일가와 같으니, 판사의 청을 내 어이 아니 들으며, 내 청을 판사가 차마 어이 듣지 않으리오. 딸자식 살리는 일은 판사가 모름지기 십분 주선하오.”

그러나 정명수는 답하지 않았다. 김류가 안고 놓지 않으니 명수가 괴롭게 여겨 옷을 떨치고 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지하(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위에 있는 자가 오랑캐에 붙어 통역일을 해주던 반역자 정명수를 부둥켜 안고 ‘판서’(장관격) 운운하며 포로로 잡힌 자기 첩과 딸을 풀어달라고 아양 떠는 장면이다. 임금은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하는데, 영의정이라는 자가 하는 꼴을 보면 역겹다. 그런 얘기가 산성일기에 그대로 적혀 있다.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끌려가는 모습도 나온다.

 

적병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따라 가는 이가 반이 넘었는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만히 물어 사람을 찾거나 하였다. 혹 길에 엎드려 비는 형상 같은 이가 있으면 적이 쇠채로 쳤다. [……] 사대부의 처첩과 처녀들은 차마 낯을 드러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고 있는 이가 무수하였다. [……]

적이 큰 길로 행군할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을 먼저 행군케 하고 두 오랑캐가 좇아 종일토록 그렇게 하였다. (끌려간 이들 중) 훗날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만 해도 66만에다 또 몽고에 떨구어진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으니 그 수가 많음을 가히 알수 있었다. 이날 임금이 그 참혹한 형상을 차마 보지 못하셨던지, 큰 길을 거치지 않고 산을 의지하여 오셔서 새문(서대문)으로 환궁하셨다.

 

애시당초부터 조선의 군대는 청군과 싸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청군이 남한산성에 다다르니 성을 지키는 군사가 나약하고 모든 장수들이 겁을 내어 나아가 싸울 의사가 없었다. (1636년 12월 16일, 피난 3일째)

 

심기원을 제도(수도 한양) 도원수로 삼았는데, 장계하기를 “포수 3백여명으로 밤에 애고개(아현)에서 적진을 쳐서 3,4백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상과 달랐다. 오히려 심기원은 호조의 기물을 삼각산(북한산)에 두었다가 도적에게 다 빼앗기고 적을 피하여 양근(경기도 양주)으로 갔다. 수도의 군병들도 심기원이 양근에 있음을 듣고 모두 그곳으로 갔다. 그래서 남한산성으로 오는 이가 없었다. (12월 28일)

 

우리나라는 싸울 뜻도 없는 가운데 구원조차 오지 않으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행궁 남쪽에 까치가 둥지를 트니 사람마다 이를 바라보고 길조라 하여 그만 믿었다. (12월 29, 30일)

 

여러 장계에 혹은 “군병의 수를 많게 하여 적을 치노라”고 한 사람이 많았으나, 실상과는 달랐다. (1월 6일)

 

청나라에 항복하고, 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1637년 11월 용골대와 마대부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국왕에 인신과 고명을 보낸다. 천하의 새 주인이 된 용골대와 마대부의 행패도 「산성일기」는 그대로 실었다.

 

용골대 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폐를 끼치고 아름다운 기생을 들이라 하니 원접사(遠接使)가 처음에는 막다가 결국 조정에 품의를 올리니 조정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각 관 기생이 다 적들의 기생이 되고 서울의 의녀와 무당도 들여보냈는데 잠깐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사대부를 노복 다루듯 쳤다. 이때 병조정랑 변호길이 용골대에 매 맞아 죽었다.

 

「산성일기」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한 48일간의 일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되, 앞의 도입부와 뒤의 종결부의 시기를 합치면 시간적으로 47년의 기간을 서술하고 있다.

▲ 해석본 '산성일기' /출판사

낙선재본, 국립중앙도서관본, 구왕궁본등 세가지 본이 있다. 작자와 간행시기는 미상이다.

옮긴이 김광순씨는 창작시기를 인조말년, 즉 1647년 이전으로 추론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0년쯤 되는 시점으로 본다.

일부에서는 한글로 쓰여 있다는 점에서 궁녀가 썼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장체나 구체적인 사실 등을 보면, 궁녀가 쓰기 어려운 것들이다. 특히 국서의 내용은 원래 한자로 되어 있던 것을 한글로 풀어 쓴 것인데, 궁녀가 이를 해독했다고 보긴 어렵다.

작자에 대해서 작품에 소개된 내용으로 보아 병자호란 당시 임금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수난을 당했던 사람으로 추측된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 매단 사건이나, 정온이 칼로 배를 찔러 자살울 시도한 내용, 삼학사로 불리는 윤집 오달제 홍익한에 대해 존경하는 문투를 사용한 점에서 남성으로 척화파의 한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김광순씨는 김상현의 아들 김광찬이나 조카 김광현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단언할수 없다고 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는 장면은 애달프다. 이를 적어본다.

 

30일에 햇빛이 없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청나라 복장)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 찬 사람들이 통곡하여 보내니 성 안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한(汗, 청 황제)은 삼밭(三田) 남녘에 구층으로 단을 만든 후 단 위에 장막을 두르고 황양산을 받쳤다. 단 위에는 용문석을 깔고 용문석 위에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교룡요를 폈다. 그 위에는 누런 비단 차일을 높이 치고 뜰에 황양산 셋을 세웠다. 정병 수만 명은 키가 크고 건장하기가 거의 비슷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각각 수놓은 비단옷과 갑옷을 다섯 벌 껴 입혔다.

한이 황금상 위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활을 타며 여러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하더니 활쏘기를 멈추고 전하로 하여금 걸어서 들어가게 하였다. 백 보 걸어 들어가셔서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시려 할 때였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는데 임금께서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제왕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 한(汗)이 남향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군악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한은 전하게 돈피 갖옷 두벌을 드리고, 대신 육경 승지에게는 각각 한 벌씩 주었다. 임금이 그 중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세 번 절하여 사례하시니, 대신들이 또한 차례로 네 번 절하여 사례하였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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