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②…임진왜란 경험 살린 구마모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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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여행②…임진왜란 경험 살린 구마모토성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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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대성의 하나…2016년 지진으로 건축물 일부 손실되기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년). 그냥 가등청정이라고도 부른다. 일본 큐슈 구마모토(熊本)의 다이묘로, 임진왜란 때 영지에서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와 경쟁관계를 이루었던 일본의 무장이다.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에서 패전하고 돌아가 자신의 영지에 세운 성이다. 1601년에 착공해 1607년에 완공했다. 이 성은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성의 하나로 꼽힌다.

성은 단단하게 지어졌다. 깊고 넓은 해자가 성 밖을 둘러쌌다. 한반도를 휘젖고 다닌 왜군 장수가 이렇게 높은 성의 주인이라니, 놀라웠다.

야산인 차우스산 일대를 성으로 쌓았다고 한다. 주성에는 두 개의 천수각(天守閣)이 있다. 대천수각, 소천수각이다. 대천수각은 5층으로 되어 있다.

 

▲ 구마모토성의 두 개 천수각 /사진=김인영

 

가토가 구마모토성을 쌓을 때 조선 울산성 전투의 쓰라긴 기억을 되살렸다고 한다.

가토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울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할거했다. 그는 울산 학성산에 일본식 성(倭城)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울산왜성이다.

왜성이 거의 축조될 무렵이 1597년 12월 23일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 그리고 조선 도원수 권율(權慄) 등이 조·명 연합군 5만명을 이끌고 울산 왜성을 공격했다. 왜의 병력은 1만6,000명.

가토군은 성채에 기대어 완강하게 저항했다. 3단 성곽중 가장 바깥의 외성은 개전 초기에 무너졌지만, 내성은 왜군의 저항을 뚫지 못했다. 왜군은 가파른 지세를 활용하고 토굴과 성벽을 이용해 조총을 쏘아댔다.

조·명 연합군은 숫적으로 많았지만 공성장비로 높이 쌓은 울산왜성을 공격하지 못했다. 가토군은 화포공격도 이겨냈다. 자연의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당시의 화포가 성채를 깨뜨리지 못했다.

조명 연합군은 달리 쓸 전술이 없었다. 인근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성을 포위해 왜군을 굶겨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왜놈들도 질겼다. 그들은 13일간 버티면서 전투에 필수적인 말까지 잡아 살과 피를 마시고, 오줌까지 버리지 않고 마셨다. 심지어 벽의 흙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버텼다.

조명 연합군이 조금만 더 오래 포위했으면 가토의 왜군은 전멸했을 것이다. 부산포와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울산의 가토군을 지원하기 위해 울산왜성으로 총 집결했다. 그 숫자가 6만명에 이르렀다.

조명 연합군은 울며 겨자멱기로 경주로 철수하고 1차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조명 연합군의 2차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는 의외의 사건으로 종식된다.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다. 막부는 조선 원정군에게 철수령을 내렸고, 울산왜성의 가토군도 1998년 11월 성을 불태우고 태화강변에 배를 대고 일본으로 철수했다.

 

▲ 일본인들의 왜병 놀이 /사진=김인영

 

가토는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구마모토성을 지었는데, 방의 다다미를 토란 줄기로 만들고,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한다.

 

▲ 구마모토성의 우물 /사진=김인영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성 내에 가토의 초상화가 있다. 게다가 가토의 지시로 판 우물 자리도 여기저기 보인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이 곳에서 보게 되었다.

천수각 높이 약 32m이고 천수대 석축높이는 약 16m다. 특히 천수의 1층 부분은 석축보다 튀어나와 있어서 성벽에 붙은 적군을 공격할 수 있도록 사각(死角)이 없는 투석창을 만들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축성을 계획할 때 그의 오랜 전투경험과 조선의 진주성(晋州城)을 공략할 때 얻었던 신지식에 오사카성 축성에 참가한 경험을 살려 가능한 거석을 수집하고 거목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는 한반도 출신 장인의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 /사진=김인영

 

1877년 발생한 내전인 세이난(西南)전쟁 때 사쓰마번(薩摩藩, 규슈 남부지역)의 영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끄는 군대 약 1만3,000명이 52일간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당시 성안에서는 3,500명이 방어에 나섰으며 이를 계기로 구마모토 성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으로서 주목받았다.

구마모토성의 주변을 둘러싼 돌담은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성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인 천수각은 세이난전쟁 직전의 화재로 소실됐으며 1960년에 복원됐다. 일본 당국은 1998년부터 축성 400주년인 2017년까지 구마모토성을 본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해 왔다.

 

2016년 4월 1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발생한 규모 6.5의 강진으로, 400년을 굳건하게 버티던 구마모토성(城)의 토대가 무너졌다. 특히 구마모토성은 돌담 약 100m가 허물어지고 천수각 지붕의 기와 등이 파손되기도 했다.

 

▲ 구마모토성의 두 개 천수각 /사진=김인영
▲ 천수각 설계도 /사진=김인영
▲ 일본도 뒤에 걸어놓은 조선 호랑이 /사진=김인영
▲ 구마모토성의 해자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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