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우는데…부소산성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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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우는데…부소산성 낙화암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1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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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을 느끼는 곳…“충신 말 듣지 않고 이 지경 되었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옥에서 갇혀 죽을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살피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공격하고 의자왕은 항복을 하게 된다. 그때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며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4년이면 충분히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런 황금같은 시간을 의자왕은 궁녀들과 향락에 빠져 허비했던 것이다.

 

▲ 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 /사진=김인영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았다.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이다. 나라는 망했지만,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백제 왕궁터가 있다. 발굴 조사에서 백제시대의 연못과 건물터, 하수도, 도로 유적등이 발견되어 일대가 왕궁터일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 부소산성 남쪽 왕궁터 /사진=김인영

 

부소산성(扶蘇山城)은 공주의 공산성처럼 해발 100m의 나지막한 구릉지에 쌓은 성이다. 사비성(泗沘城)이라고도 하는데, 산정에는 태뫼식, 그 주위에 포곡식으로 쌓은 전형적인 한국 성곽 양식이다.

 

▲ 삼충사 /사진=김인영

 

성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먼저 삼충사(三忠司)라는 사당이 나온다.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등 세 충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성충은 앞서 삼국사기 기록에 나와 있듯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했지만, 의자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가 황산벌에서 장열하게 죽은 장군이다.

세 충신이 이 곳에서 망국을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 영일루 /사진=김인영

 

삼충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동쪽에 해맞이를 하는 영일루(迎日樓)가 나온다. 부소산성의 동대(東臺)에 해당한다. 이 곳에서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다보는 곳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1964년 조선시대 관아문을 옮겨 세우면서 영일루라 했다.

 

▲ 군창터 /사진=김인영

 

그 뒤편으로는 곡식창고 자리였던 군창 터가 있다. 이 곳에서는 불탄 쌀과 콩들이 발견되었는데,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백제군이 적에게 군량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15년에 한 초등학생이 칡뿌리를 캐다가 처음으로 발견했는데, 땅속에 묻힌 지 1,250년 만에 나온 것이다.

 

▲ 백화정 /사진=김인영

 

부소산 정상에 삼천 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그곳, 낙화암(落花巖)이 나온다.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이 바위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조에 ‘백제고기’(百濟古記)』라는 당시의 사료를 인용해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의자왕이 여러 후궁들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속설이다. 궁녀들만 떨어져서 죽었을 뿐이고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 『당사』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궁녀들이 낙화암에 투신해 자살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이 가미되어 조선조에 문인 김흔(金訢) 민제인(閔齊仁) 등이 시에서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오늘날 3천 궁녀가 죽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궁녀 3천명의 숫자는 의심되지만, 나라 잃은 백성들의 한을 느낄수 있다.

 

▲ 고란사 /사진=김인영

 

가파른 계단 길을 내려가면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가 나온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물을 맛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임금에게 약수물을 올릴 때 고란초가 이 절 근처에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옛 노래가 생각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치면은/ 구곡 간장 올올이 찢어 지는 듯/ 누구라 아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니

 

▲ 궁녀사 /사진=김인영
▲ 궁녀사 내의 궁녀들 영정 그림 /사진=김인영
▲ 금강에서 본 고란사 /사진=김인영
▲ 낙화암 절벽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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