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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왕 정성공①…아버지 정지룡의 유산

기사승인 2018.02.17  12: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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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일본인…아버지는 淸에 투항했지만, 아들은 明에 충성

 

오늘날 대만(臺灣, 타이완)이 중국 영토가 된 것은 450년 밖에 되지 않았다. 1662년 명나라 유신이자 중국 남동부 해상세력이었던 정성공(鄭成功, 1624~1662년)이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대만에 한족 왕국을 세웠고, 1683년 청나라가 대만의 정씨 왕국을 멸망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중국 영토가 되었다.

중국 역사는 수천년 동안 중원의 대륙을 놓고 전개되어 왔지만, 주변 섬에 대한 영유권을 행사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은 말레이-인도네시아 계통의 토착민들이 살던 오랑캐의 땅이었고, 네덜란드에 점령된 식민지였다. 하지만 정성공은 이 아름다운 섬을 중국 영토로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그를 ‘대만의 아버지’라 부른다.

정성공을 설명하려면 그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을 빼놓을수 없다. 그는 아버지 덕에 해상세력을 영도하게 되었고, 아버지에 등을 돌림으로써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는 20살이지만, 세상을 떠난 시간의 차이는 1년에 불과하다. 명·청 교체기에 정씨 부자가 한 많은 세월을 함께 하며 살아간 것이다.

 

▲ 정성공 초상화 /위키피디아

 

아버지 정지룡은 젊은 시절에 갈데까지 간 방탕아였다. 계모와 잠자리를 한 패륜을 저질러 아버지에게 쫓기듯 집을 뛰쳐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마카오(澳門)였다. 마카오는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중국과는 다른 신천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상업을 하던 외조부를 찾아가 기숙하며 일을 도왔다.

10대의 정지룡은 또다른 동생 지표와 지호를 마카오로 불렀다. 이어 광조우(廣州)에서 상단을 꾸리던 외삼촌 황씨의 밑에 들어가 동생들과 함께 일을 도왔다. 외삼촌 상단에서 일하면서 정지룡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한 포르투갈 상인은 그에게 많은 돈을 유산으로 남겨주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사귀면서 카톨릭 세례를 받고 니콜라스 이콴이라는 세례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다고 한다. 포르투갈인을 사귀기 위한 방편으로 개종했을뿐, 카톨릭도 중국의 미신과 다를게 없다고 그는 보았다고 한다.

정지룡은 포르투갈어를 나름 열심히 배워 외국인들과 그럭저럭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언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외가의 상단과 거래하던 또다른 상단을 찾아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새로 들어간 상단의 주인은 이단(李旦)이라는 자로, 필리핀에 거주하면서 일본과 중국해안, 대만을 오가며 밀수업을 하던 큰 무역상이었다. 정지룡은 드디어 큰 물에서 놀게 된 것이다.

정지룡이 이단에게 가담할 무렵 중국산 비단 무역이 대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이단과 그의 동업자들은 일본 쇼군(將軍)으로부터 베트남 통킹만까지 무역할수 있는 허가장을 받아 놓았다. 정지룡은 이단의 신임을 얻어 조직 내에서 위치를 굳혀 나갔다.

이단의 상단에서 활동하던 어느날, 정지룡은 일본 나가사키현 북서부 히라도(平戶)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한 여인에게 첫눈에 끌렸다. 이름은 다가와(田川)였다. 다가와는 일본 큐슈지방의 한 영주를 받드는 사무라이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로, 그날 연회에 시중을 들기 위해 나왔다. 다가와는 정지룡보다 한 살 더 많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두 남녀가 비공식적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정성공이다.

 

▲ 일본 쇄국시기의 중국 배 /위키피디아

 

정지룡은 이단의 상단에서 대만과 중국 해안을 연결하는 무역을 맡았다. 중국 해안에서 교역항을 찾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마카오를 침공했지만 실패했고, 정지룡을 통해 명 조정에 항구 하나 내어달라고 요청했다. 명 조정과 네덜란드 사이를 오가며 협상을 중재한 정지룡은 네덜란드에게 중국 해안은 불허하니, 대만에 가서 요새를 짓고 무역항으로 활용하라고 권한다. 이후 네덜란드가 1624년 대만 타이난(臺南)에 요새를 지으니, 젤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다. 이 곳은 나중에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 점령해 왕국을 세우고 수도로 삼게 된다.

정지룡 일당은 포모사(Formosa, 대만의 옛이름)의 최대 밀수꾼이었다. 명나라는 조공 이외의 사무역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해안을 떠나 외국과 거래를 하는 행위는 모두 밀무역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해변의 정성공 탄생지 비 /위키피디아

정성공의 어릴 때 이름은 일본식으로 후쿠마쓰(福松)였다. 어머니 다가와와 함께 히라도에서 어렵게 살았다. 생활비는 아버지 정지룡이 가끔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정지룡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계모와 정을 통한 죄로 집을 떠났던 정지룡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인 샤먼(厦門)으로 들어가 가장 자리를 꿰어 찼다. 정지룡은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은데다 이단 휘하의 세력도 손에 넣어 중국 남동부 해안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이단 상단의 2인자인 안사제(顔思齊)의 딸과 결혼해 상단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러던 중에 1625년 8월 12일 정지룡의 보스 이단이 히라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지룡은 이단 상단을 장악하기 위해 반대파들과 전쟁에 돌입했다. 훔친 자금으로 선박을 사들이고 선원들을 고용했다. 더 이상 네덜란드와의 중계무역을 하는 상인이 아니라, 무장선단의 선장으로 나섰다. 그는 마닐라로 가는 스페인 선박을 나포해 화물과 보화를 탈취했다. 해가 갈수록 정지룡의 해적질은 멋진 사업이 되었다. 1626년에 정지룡은 자신의 뒤를 돌봐준 네덜란드인에게 2만8,000냥 상당의 도자기와 물자가 가득 실린 선박 9척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대만~푸젠성 사이의 항로를 장악하게 된다.

 

드디어 명 조정이 정지룡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무장선단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다. 1627년 명의 숭정제(崇禎帝)는 사신을 보내 정지룡에게 칙서를 내렸다.

“그대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사(赦)할 것을 명하니…그 은혜를 받아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으로 임명하노라.”

북쪽 만주의 청나라와 교전을 해야 하는 명나라로선 해상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선택했다. 해적 소탕을 해적에게 맡긴 것이다. 정지룡에겐 기회였다. 명 조정의 대신이 됨과 동시에 자신의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계기가 되었다.

정지룡은 상단을 이끌고 출전해 경쟁자 허심소의 상단을 제압했다. 살아남은 허심소의 부하들은 정지룡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정지룡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로부터 정지룡은 중국 연안의 전 해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1628년 청 조정은 정지룡에게 초무(招撫)라는 벼슬을 내렸다.

 

▲ 중국 남부 지도 /위키피디아

 

정성공이 7살 되던 해 아버지 정지룡은 동생 정지아를 일본 히라도에 보내 아들 정성공을 푸젠성 본가로 데려 오도록 했다. 그때 정성공에겐 어머니 다가와가 다른 남자와 만나 낳은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다가와는 본처를 두고 있는 정지룡에게 가지 않겠다고 하고, 아들 정성공만 삼촌을 따라 가게 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정성공에겐 많은 상처를 남겼다. 대만의 기록에는 정성공이 매일밤 어머니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푸젠성 안해(安海)의 본가에 도착한 정성공은 아버지의 부(富)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정지룡은 주변의 웬만한 나라의 부를 넘어선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집 안해성은 외벽이 5km에 이르렀고, 성 내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정원은 분수와 물고기가 노니는 연못, 서화와 옥, 금으로 치장한 정자와 찻집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이국의 동물들을 감상하는 조그마한 동물원도 갖고 있었다.

정지룡의 부는 밀수와 해적질로 모은 것들이었다. 그는 명 황실에 충성을 다하며 수군 제독으로써 동료 사업자를 해적으로 몰아 물리치고 재산과 선원을 빼앗았으며, 중국 연안을 통과하는 선박에 세금을 부과했다. 정지룡이 장악한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들은 보호를 받기 위해 ‘정’(鄭)이라는 깃발을 달고 다녀야 했는데, 그 깃발을 사는데 3,000냥을 주어야 했다. 이런 정황을 모르는 외국선들은 남중국해 연안의 모든 선박이 정씨 가문의 것인줄 알았다고 한다. 중국 연안은 명 조정의 허락을 받은 정씨 왕국의 영토나 다름 없었다.

정지룡은 사설부대로 흑인경호대를 운영했다. 흑인들은 원래 아프리카 출신으로 포르투갈인의 노예였다가 풀려난 자유인이었다. 정지룡은 이들을 모아 경호부대로 활용했다. 흑인들은 기묘한 곱슬머리에 검은 피부의 거한들로, 겉에는 육중한 갑옷을 입고 그 안에 번들거리는 비단 옷을 입고 있어 중국인들에겐 악마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정지룡의 적들은 흑인경호대를 듣기만 해도 공포에 질렸다. 흑인부대는 공격할 때 자신들의 수호신인 야고보를 찬양하는 함성을 질렀는데, 상대방은 그 소리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정성공은 아버지의 궁궐에서 15살까지 새 어머니와 새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공부에 전념했다. 춘추(春秋)와 같은 역사서는 물론 무예도 닦았다.

17세가 되던 1611년 정성공은 부인을 맞게 된다. 부인은 부유한 동(董)씨 가문의 딸 취잉이었다. 그들은 결혼하자 곧바로 아들을 낳아 집안의 후사를 이었다. 정지룡은 40세도 안된 나이에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청나라 순치제(順治帝)가 5살에 황제로 즉위하자, 삼촌인 도르곤(多爾袞)이 섭정을 맡아 실권을 행사했다.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난을 일으킨 이자성에 나라를 내어주고 자결했다. (1643년) 명나라 유신 오삼계는(吳三桂)는 도르곤에게 산해관을 열어주고 청군과 함께 이자성의 무리들을 쫓아 갔다. 명나라의 황족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다시 일으키니 남명(南明)이라 했다. 남명 정권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정지룡이었다.

정지룡은 당시 나이 41세, 한 때 밀수업에 몸담아 큰 재력을 형성한 성공한 상인이자 무인으로, 중국 남동부 해안의 선대를 장악한 해양 군벌로 군림하고 있었다. 정지룡은 남명 정권의 킹 메이커였다. 그의 개인 재산은 당시 몇몇 나라의 부(富)보다 많아 오직 그 혼자만이 앞으로 닥칠 남명 정권의 저항운동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남명 정권을 수립한 홍광제(弘光帝)는 명의 유신들에게 새로운 귀족과 장수들을 임명하면서, 정지룡에겐 남안백(南安伯)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남경 방어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남경은 양쯔강을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하지만 남경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남명의 조정은 더 남하해 정지룡의 거점인 푸젠성으로 이동해왔다. 홍광제는 사망하고 융무제(隆武帝)가 새로 즉위했다. 푸젠성으로 이동한 남명 정권은 정씨에게 더 매달렸다. 홍광제는 정지룡에게 평노후라는 작위를 봉하고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3개 부처의 통솔권을 주었다.

21살이었던 정성공도 융무제로부터 어영중군도독이라는 관작을 부여받았다. 융무제는 정성공에게 일본에서 얻은 복송(福松)이라는 이름 대신에 ‘뜻한 바를 이루다’는 의미의 성공(成功)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아울러 황실의 성씨인 주(朱)씨를 써도 좋다는 윤허를 내렸다. 이로부터 정성공은 ‘나라의 성을 쓰는 분’이라는 뜻으로 국성야(國姓爺)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융무제는 정성공을 좋게 보았다. 얼마 안가 정성공에게 충효백(忠孝伯)으로 작위를 올리고 초토대장군이란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아버지 정지룡의 마음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정권 잔당을 토벌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겐 푸젠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하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싸우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북쪽에서는 명나라 유신들이 대거 투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나라에 투항하면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때 정성공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푸젠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 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썼다.

정성공도 고민했다.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 나라를 지킬 것인가.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그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삼촌들도 육지에서 이기기 힘들면 바다로 나가 항전을 계속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지룡은 마침내 남명 황제를 배신하고, 적이었던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했다. 남명의 한족 국가는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새로운 영웅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아버지 덕분에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비범한 소년이었다. 21세에 남명 정권의 귀족이 되고, 22세에 반청운동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세에 왕으로 책봉되기 이른다. 그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중국 심장부인 난징(南京)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정성공은 당시로는 놀라울 정도로 국제화된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경호병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인디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인을 특사로 활용했다. 그의 부대에는 독일인과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대적한 세력은 네덜란드로, 당대 세계 최강의 해양국가였다.

 

▲ 유년기 정성공과 어머니 다가와 상 (대만 대남시 정성공묘) /위키피디아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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