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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10만명의 운명은?

기사승인 2018.02.16  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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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숱한 고생 끝에 8천여명 귀환…귀국후 받은 차가운 대우

 

임진왜란이 종전한지 7년째 되던 1605년, 사명대사가 사절을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을 벌여 납치된 조선인 수천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당시 조선의 쇄환사절이 왔다는 소문이 일본 열도 전역에 퍼져 있던 조선인 포로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같다.

2년후 1607년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쇄환사절이 일본을 다녀가며 또 1천여명의 조선인을 송환시켰다. 그때 애절한 사연이 기록에 남아 있다.

 

사절이 머무는 숙소 문 밖에 잡혀온 조선인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몰려와 흩어지지 않았다. 역관 박대근이 “조선에 돌아갈 때 데려 가겠다”고 일러주어 간신히 돌려보냈다.

더 먼 곳에 있던 포로들은 편지를 보내 자기들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 가운데는 두세명의 여자가 한글로 편지를 보낸 것도 있었다. 역관이 회답했다.…

포구의 갈대밭에서 어떤 남자가 뛰쳐 나와 “나 조선사람이오. 돌아가는 배에 실어주시오”라며 부르짖어 태워 주었다. 일본인 주인이 놓아 주지 않아 기다렸다는 것이다. 한 여인은 도망쳐 배가 있는데로 왔는데, 일본인 남편이 칼을 들이대며 놓아 주지 않으려 하므로, 대마도 출신 통역이 타이르며 말려 겨우 물러나게 했다.

 

▲ 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프로그램 ‘사라진 백성, 피로인’의 컷. 사명대사가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만나는 장면. /KBS

 

임진왜란(1592~1598년) 7년 동안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끌려 갔던 것일까. 구체적인 통계가 없다. 침략을 당한 조선 정부나, 침략에 실패해 패주한 일본 모두가 숫자를 세지 않았다. 왜놈들이 닥치는대로 조선인을 끌고 간 것만은 사실이다. 일본은 영주(다이묘) 중심의 체제였으므로, 전국적인 통계를 내기 어려웠다고 쳐도, 조선정부는 백성들이 얼마나 끌려갔는지 세어보지도 않았단 얘기다. 백성이 안중에도 없었다는 게 옳은 평가일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7년 전란에서 끌려간 조선인이 적게 잡아 2만, 많게 잡아 5만 정도로 추정하지만, 한국 학자는 6만 또는 10만으로 본다.

하지만 돌아온 숫자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일본인 학자 요네타니 히토시(米谷均)가 한국과 일본 사료를 전수조사한 결과, 6.323명이 조선으로 귀환했다는 숫자를 제시했고, 한국 학자 이상희는 8,482명이라고 밝혔다. 이 조사에서 한국 학자의 통계가 맞을 것이다. 조선 자료에 입국자 정보가 많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조선인이 구사일생으로 조선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 갔을까. 10만명 정도가 잡혀갔다는 주장이 맞을 것 같다. 조선으로 돌아오려다 죽은 사람도 많았다. 체념하고 일본에 눌러 사는 사람은 더 많았을 것이다.

조선 정부의 쇄환사절단이 도쿄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사절단이 돌아가는 항구에 배를 타기 위해 몸이 바닷물에 반이 잠기도록 쫓아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흥남철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왜군은 왜 조선인들을 끌고 갔을까.

쓰시마섬 번사 사고 시키우에몬(佐護式右衛門)이 1655년 동래부사에게 보낸 외교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임진년(1592년) 히데요시의 뜻에 따라 귀국(조선)에 군대를 보내, 나라 안의 사람들을 남김없이 공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숨어 있던 수많은 남녀와 아이들을 본방(일본)에 연행해 왔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하인이 없던 사람들까지 별안간에 주인이 되어 기쁜 나머지 ”또 조선을 침략하면 더 많은 하인을 부릴수 있을 텐데“라며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으로 왜군은 엄청난 수의 조선인을 피로인(被擄人)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왜 전쟁 말기에 인간 사냥에 나서 조선인을 끌고 갔을까. 쓰시마섬 번사의 문서를 보면, 그들이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을 끌고가 노예로 삼았던 게 주목적이었다. 왜군이 전쟁 초기부터 조선인들을 끌고 간 것은 무자비한 병력 징발로 부족해진 농촌 일손을 보충하는데 동원하고, 무사(사무라이) 집안에 잡역 노비로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자기 기술을 지난 도공(陶工)을 납치하려고 머리를 쓴 것은 전세가 거의 기울 무렵이었다.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혀 후에 일본에서 조선유학을 가르친 유학자 이진영(李眞榮)도 처음에 어느 농가에 배치되어 농사를 짓다가 다른 농촌에 팔려가는 머슴의 신세였다.

 

왜놈들의 조선인 사냥은 지금 들어도 참혹하고 끔찍했다. 왜란때 조선에 왔던 일본 승려 게이넨(慶念)이 남긴 기록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일본 병사들은 포악하고 잔인했다. … 흰옷을 입은 사람은 눈에 띠는 대로 베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서 사슬로 목을 묶어 끌고 갔다.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를 무엇에 쓸 작정인가.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정유재란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3년만에 돌아온 강항(姜沆)의 저서 「간양록」(看羊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왜선 한 척이 지나갔다. 웬 여자가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없소“ 하였다.

둘째 형수님이 나가본즉, 애생의 어머니가 아니냐. 서로 엇갈린 이후 소식을 몰라 벌써 죽었거니 생각했는데, 아직 안죽고 살아 있다니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필경 굶어 죽고야 말았다. 외쳐 부르던 소리 아직도 창자를 애인다. 날마다 밤마다 울고불고 몸부림치는 그를 왜놈들은 두들겨 팼으나 두들겨 패는 것쯤으로 잦아들지 않았다. 애생의 어미는 몸부림치다가 그대로 굶어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그 후에 나는 들었다. …

가련이는 둘째 형의 아들이다. 올해 여덟살이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갯물을 들이켰는데, 그 길로 병을 얻어 토하고 설사하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이놈들 봐라! 앓는 놈을 안아다가 물 속에 내 던졌다.

“아버지! 엄마! 아버지! 아버지! 부르다 부르다 겨워 그 소리마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아비가 소용 있나. 어미가 소용 있나. 네 죽음을 멍하니 보고만 있는 아비가 아니냐, 어미가 아니냐.

 

왜놈 배에 끌려가며 목격한 내용이다. 첩 애생의 애닯은 목소리, 조카를 죽이는데 어쩔수 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형과 형수, 그리고 자신의 모습…. 40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이 구절에서 눈물이 난다.

 

일본으로 연행된 조선 피로인은 북으로는 도후쿠(東北) 지방에서, 남으로는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산되었다. 그 중에는 중국, 동남아, 인도에까지 팔려간 사람도 있었다. 가장 많이 분포된 지역은 규슈(九州), 시코쿠(四國), 추코쿠(中國)을 비롯해 오사카, 교토, 나고야, 에도(江戶) 등 도시와 항구에 뿌려졌다.

 

▲ 전남 순춘시 해룡면 신성리의 충무사. 임진왜란때 공이 컸던 이순신, 정운, 송희립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문화재청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부 돌아왔다. 포로의 귀환 방법은 크게 세가지다. ① 자력으로 탈출해 귀국한 경우 ② 조선의 사절단의 요구로 데려온 경우 ③ 쓰시마의 소(宗)씨들이 중매에 나선 경우 등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재개는 광해군 2년(1609년)에 이뤄졌는데, 그 이전에 귀환자는 대개가 자력으로 탈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탈출 수단으로 사용한 배는 다양한 형태로 조달되었다. 훔치거나, 빼앗고, 빌리고, 구입하고,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도망가다가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강황의 ‘간양록’에 전라좌병영의 이엽(李曄)이 도망가다 발견되어 자결했는데, 왜놈들이 시체를 건져 ‘환괘의 형’에 처했다는 대목이 있다. 환괘의 형이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다이묘의 허락을 받아 귀국하는 경우도 다른 영지에서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과 외교가 재개된 이후에 공식적인 쇄환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피로인들을 데리고 왔다. 일본 전역에 분견사를 파견해 조선 정부의 분견사를 보내 포로 조선인들을 확인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고 연락이 단절된 곳이 많아 사절단의 소식이 전달된 곳이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643년까지 다섯차례 파견되었고, 이중 쇄환사라는 직책이 파견된 것은 1607, 1617, 1624년 세차례다.

 

그러면 귀환한 피로인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조선의 사료에는 피로인의 귀환을 기록한 기사는 많지만, 그들의 대우에 관한 언급은 의외로 적다.

1605년 사명대사((惟政)가 이끄는 사절단이 1,391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귀국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경담이라는 사람이 쓴 「난중잡록」이다.

 

유정은 쇄환한 피로인을 이경준에게 맡기고 형편대로 나누어 보내도록 했다. 이경준은 휘하의 선단에 명하여 사후처리를 위임했다. 선장들은 피로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맡자 우리가 보는 앞에서 포박했다. 그 모습은 약탈보다도 더 심했다. 신원을 물어 대답하지 못하는 피로인도 있었는데, 어려서 잡혀가 출신지가 조선이라는 것만 알뿐 자기의 족보나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자도 많았다. 선장들은 그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피로인이 미인이면 그 남편을 묶은채 바다에 던져 그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이러한 소행은 결고 한두 예로 그치지 않았다.

 

이런 나라도 있나. 숱한 고생을 하다고 조국이라고 찾아왔는데, 남자는 노비로 삼고, 여자는 첩으로 삼다니….

1607년에는 1,418명의 피로인을 데려와 민간에 분산배치하고 관리들은 그냥 가버렸다. 1617년에는 귀환한 321명을 부산에 내려놓고 마중오기로 한 관리가 나타나지 않아 모두 끼니를 걸렀다고 한다.

이런 소식이 일본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피로인들에게도 알려진 것 같다. 쇄환 사절단이 가서 돌아오라고 종용하면 그들 중 일부는 “조선은 피로인을 쇄환해도 대우가 형편없다고 합니다. 저들이 포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닙니다. 쇄환시키고도 그렇게 냉대합니까”라고 힐문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본인 학자 요네타니 히토시는 이렇게 분석한다.

첫째, 조선의 본국 사대부들은 일본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이 적군에 협력한 사람들이 아닐까, 자발적으로 적군을 따라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력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인정하지만, 쇄환사절단을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조선 정부가 쇄환정책을 취한 것은 국가의 체면에 관계되는 명분론에 치우쳤다는 점이다. 결코 포로가 된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국인을 데리고 와 부산까지 실어나르면 끝이고, 그 다음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방치했다. 전형적인 사대부 계급주의의 발상이 빚어낸 결과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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