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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 10년…국보 1호 자격 있나

기사승인 2018.02.13  17: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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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동종은 보물 해제…문화재 잃은 책임으로 국보 해제해야

 

10년전인 2008년 2월 10일 저녁. 설날 마지막 연휴를 즐기던 국민들은 서울의 상징이자 국보1호인 숭례문(崇禮門)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TV화면으로 생생히 보았다. 많은 이들이 “저 불을 왜 못 끄느냐”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숭례문은 5시간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후 정부는 복원사업을 벌여 2013년 4월에 새로 지은 숭례문을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붕괴되는 남대문 /위키피디아

 

숭례문은 총길이 18.6km로 둘러 쌓인 한양도성 중 가장 남쪽에 설치된 문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듬해인 1393년부터 지어졌다는 한양도성의 제1관문이다.

조선의 중심 한양(漢陽)의 가장 중심되는 대문이었기에 한양에 올라 온 백성들에겐 저 멀리 보이는 숭례문이야말로 감동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저 문을 통과해 한양 땅을 밟으면 임금님이 사는 궁궐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조선의 모든 문화와 진기한 물산이 집결된 곳, 저 꿈에 그리던 한양을 숭례문만 통과하면 볼 수 있게 된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인왕산과 안산, 백악산중 어떤 산을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 끝에 경복궁 뒷산인 백악산(白岳山)을 주산으로 정했다. 주산을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자연히 한양의 전체 디자인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4개의 내사산(內四山, 백악, 인왕, 낙산, 목멱산)과 4개의 외사산(外四山, 삼각산, 관악산, 덕양산, 용마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만들었다.

내사산 4개에 빙 둘러서 성곽을 쌓았으니 이름하여 한양도성이다. 그 내사산의 남쪽 문이 숭례문이다.

4대문은 유교의 5가지 덕목인 仁, 義, 禮, 智, 信에 따라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었다. 崇禮門(예), 興仁之門(인), 敦義門(의), 肅靖門(지)다. (숙정문에 智와 뜻이 같은 靖자를 쓴 것은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 남는 글자 信은 어디에 붙였을까. 한양도성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보신각(普信閣)에 썼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이고,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다.

 

▲ 북원된 숭례문 /자료=문화재청

 

숭례문은 예로부터 불(火)과 관련된 얘기가 많다.

남대문에서 외사산으로 가면 관악산이 나온다. 관악산의 형세는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이었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대책으로, 남대문에 남지(南池)를 조성하고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연못(호암산성 한우물)을 설치했다.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기도 했다.

▲ 숭례문 편액 /한선생 제공

그러면 왜 숭례문의 편액은 세로 글씨로 쓰여 있을까. 흥인지문을 비롯해서 모든 문의 편액이 가로쓰기가 보편화 되어 있는데, 숭례문만 예외다.

그 비밀스런 이유는 역설적이다. 숭례문의 례(禮)는 5행의 화(火)에 해당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이므로 숭례(崇禮)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타오르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以火制火),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의 처방이었다. 이른바 맞불인 셈이다.

 

관악산의 화기가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다가 한강에서 1차 관문을 지나 불길을 누그러 뜨리고 계속 직진한다.

나아가서 숭례문 옆에는 남지(南池)라하여 작은 못이 있었다.

남지는 세종임금 때 만들어졌다. 세종실록에는 "경복궁의 오른 팔은 대체로 모두 산세(山勢)가 낮고 미약하여 널리 헤벌어지게 트이어 품에 안는 판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다 못을 파고 문안에다가 지천사(支天寺)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남지는 1907년 10월 26일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후에 다이쇼 천황)가 숭례문 안으로 들어오기 싫다고 해 숭례문 북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남지도 메워버렸다.

남지의 물을 만나 화기가 누그러지고 두 번째 관문과 세 번째 관문인 숭례문 편액을 만나 다시 불기운이 소멸된다.

그래도 남아있는 화기는 현재의 일직선상인 태평로로 가지 못한다. 왜냐, 조선시대에는 태평로가 없었다. 태평로는 1897년 명성황후의 국장 때 비로소 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남대문로로 가서 보신각을 통해 경복궁에 이르렀다. 그 휘어진 길을 통과해 경복궁에 닿는다 해도 이제 경복궁의 해치(獬豸)상이 기다린다.

우리의 궁궐은 목조인 까닭에 여러 번의 화마를 누그러트리는 풍수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남대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의 화마도 비켜가며 10년전까지 서울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유지했다. 그러나 화마를 막던 기운이 쇠하고, 숭례문을 불타버리고, 그 자리에 복원된 건축물이 우리를 기다린다.

복원된 숭례문 옆을 지날 때마다 남지를 복원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서운함을 금치 못한다. 복원에 참여한 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복원하려 했고, 무너진 우리 역사를 복원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남대문 밖에 엄청난 부지를 확보하고 복원하면서 남지를 복원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곳이 남지였다는 표석만 하나 세워 놓았을 뿐이다.

 

▲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사진. 1904년~1905년 로이터 통신원과 미국공사관 부영사를 지낸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은 숭례문 문루 근처의 성벽에서 남대문정거장 방면으로 촬영한 것으로, 용산과 의주로 이어지는 전찻길이 각각 보이며,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남지(南池)도 확인된다. /자료=서울역사박물관

 

대한민국 국민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국보 1호는 남대문, 보물1호는 동대문이라고 배워 왔다. 남대문이 국보1호라는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고 당연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숭례문이 국보1호로 지정된 것도 의외다. 국보에 대한 번호매김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서울시청격인 경성부청에서 제일 가까운 사적지를 일련번호로 매기면서 숭례문이 조선고적 제1호가 되었다,

그러면 이 구조물이 여전히 국보 1호라고 할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현재의 남대문은 10년 불타 없어지고, 새로 지은 건물은 복원물이다. 아직도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인정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에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면 복원된 건축물도 국보인가. 어려서 국보 1호는 남대문이라고 배웠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서울의 중심관문이 국보1호라고 생각한다고 이 명제가 당연시되어야 할까.

2005년 화마로 불타버린 낙산사 동종은 재건과정을 거쳐 복원되었지만, 보물 479호 자리는 문화재청 기록에 공란으로 비어 있다. 복원한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수 없다는 문화재청의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복원한 낙산사 일원을 2008년 12월 18일 사적 496호로 지정했다. 1968년 보물 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에 대해 문화재청은 화재가 나던 그해 7월 7일 보물 지정을 해제했다.

낙산사 동종을 거울로 삼으면, 복원된 숭례문은 국보 1호 자리를 비워 주어야 마땅하다. 복원된 건축물이 국보 1호를 유지할 자격이 없다. 후손으로서 숭례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도 국보 1호를 해제해야 한다. 낙산사처럼 사적으로 바꾸고, 사적 1호 자리를 남대문에 내어줌이 어떤지.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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