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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1문단⑥…이데아에 관하여

기사승인 2018.02.11  10: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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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아와 상기설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플라톤이 남긴 글 어디에도 이데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자로 쓰인 진리는 입으로 말해진 진리보다 열등하다며 글의 허약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전승된 신화를 활용하거나 스스로 창작한 신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데아는 신화를 통해서 바라볼 때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 따르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영혼은 이데아를 볼 기회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화편 󰡔국가󰡕의 에르(Er)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영혼은 저 세상에서 각자 자신이 살아갈 삶의 표본을 선택하게 되며 또한 각자의 다이몬(daimon 수호신)도 선택합니다. 그리고 영혼들은 다이몬의 인도로 숨 막힐 듯한 무더위를 뚫고 망각의 평야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망각(lethe 레테)의 강’ 옆에 야영하는데, 갈증이 나서 그 물을 마시게 됩니다. 일단 물을 마시면 과거를 잊어버리게 되며, 수행을 쌓지 않은 영혼일수록 많이 마셔 더욱 이데아를 잊게 됩니다. 그 후 영혼들은 저마다 뿔뿔이 재탄생을 위해 유성처럼 위로 이동해갑니다.

플라톤이 대화편에 나오는 신화를 어느 정도 진담으로 여겼는지는 󰡔파이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일들을 내가 말한 그대로라고 우기는 것은 분별 있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겠지. 하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만큼, 우리의 영혼과 그 거처가 실제로 그와 같거나 비슷하리라고 믿는 것은 적절하고도 가치 있는 모험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이데아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데아는 각자 자신만의 이데아이지 타인의 이데아나 보편적 이데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각의 물을 마시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선택한 삶의 표본, 즉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망각한 것입니다.

영혼은 삶을 통해 성장하고자 이 세상에 옵니다. 윤회를 통한 영혼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데아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터득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삶의 표본인 청사진입니다. 이를테면 게임에서 보이는 화면 속 세계가 현실이라면 CD의 프로그램은 이데아인 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이 성취할 목적에 따라 체험할 내용을 미리 프로그래밍해 놓습니다.

이데아론은 배움을 상기(想起)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언가를 상기한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희랍어로 진리를 ‘aletheia’라고 하는데, 여기서 ‘a’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이며, ‘lethe’는 망각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레테이아는 ‘비(非) 망각’을 의미합니다. 즉, 진리라는 앎은 망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망각의 강’ 신화를 들려주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따라서 교육이란 상자를 채우듯이 머릿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일이 아니라,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이끌어내도록 돕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능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영혼은 그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런하고 탐구적으로 만들어준다고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온 영혼은 삶의 체험을 통해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로워지려고 하고, 죽고 나면 저 세상으로 돌아가서 선택했던 이데아를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반추(反芻)합니다. 이런 거듭된 삶을 통해 완성된 영혼은 마침내 윤회에서 벗어납니다. 영혼에게 삶이란 철학(수행)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이란 죽음에의 예행연습이라고 합니다.

 

⊖ 이원성의 세계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현상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비가시적 세계(예지계)가 있다고 하는데, 주의할 점은 이 두 세계가 따로 떨어진 공간을 의미하지 않으며, 물질세계는 그림자나 허상이 아니고 감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두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며 이데아의 세계인 예지계는 현상계의 원인이고 근원입니다.

플라톤은 원인인 예지계와 그 결과인 현상계가 모두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지계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며, 현상계는 예지계의 이데아를 알 수 있는 단서이자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플라톤은 감각 경험을 무시하지 않고 감각을 통해서 자신에게 제시된 것을 감지함으로써 이데아에 대한 앎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이데아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이 현상계의 감각적 요인을 통해 영혼이 망각해버렸던 것을 상기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움과 숭고는 영혼을 이데아의 세계로 이끄는 매혹적이고 감동적인 요인입니다.

다만 감각적 지각은 고통이나 쾌감 등으로 주의를 산만하게 하여 우리를 혼란하게 하므로 지각한 다음에 순수이성의 힘으로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이데아를 향한 길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됨을 깨닫고 당혹감과 혼돈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대화하면 가오리에 쏘인 것처럼 온몸이 마비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묻기만 할 뿐 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미해결된 문제를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하는데, 원래는 항해술에서 배가 난관에 부딪히게 되어 더는 나아갈 수 없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상대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잔을 비워야 물을 채울 수 있듯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자각이 있어야 앎을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답을 말해주지 않는 것도 자신의 진리는 각자 자신이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해답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용기란 무엇인가?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묻습니다. 이렇게 의미를 묻고 규정하는 대화를 통해서 지금 나에게 벌어진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이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고 의미를 파악해내게 합니다. 내 앞에 나타난 현상은 나의 이데아(삶의 표본)를 발견할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데아는 누스(반야 nous)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이는 감각에 의존하지 말고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즉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의 의미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영혼의 정화(카타르시스)가 필요합니다. 의학적으로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설사를 의미합니다. 설사는 일종의 몸의 정화방법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비우고 순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합니다.

즉 기존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감각적 지각에 의존하는 의견(Doxa)를 버리고, 배움에 지장을 주는 의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 후설의 ‘에포케(판단중지)’가 곧 카타르시스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정화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나에게 벌어진 현상의 의미를 찾다 보면 어느 날 홀연히 번쩍하며 이데아를 상기하게 됩니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에 대한 깨달음을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처럼 말로 옮길 수 없고, 주제는 그 자체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오랜 교유(함께함)와 공동생활을 통해 스스로 길러지고 나서야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갑자기 혼 안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일곱째 편지󰡕)

이것은 단순한 학문적 차원의 지식이 아니며, 고통과 수고를 동반하는 여정을 통해 이룩한 존재의 거듭남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입니다.

 

⊖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비유 중 선분의 네 부분은 인간의 마음이 참된 앎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첫째 선분인 에이카시아에서 피스티스, 디아노이아를 거쳐 넷째 선분인 노에시스로 진보하는 것입니다.

이 네 부분은 또한 둘씩 묶어서도 구분되는데, 낮은 쪽 둘은 가시적(可視的) 세계로서 동굴의 비유에서는 동굴 안이고, 높은 쪽 둘은 가지적(可知的) 세계로서 동굴 밖입니다. 앞의 두 단계인 가시적인 영역은 물질계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적 경험 수준입니다. 앞의 두 단계가 꿈 같은 상태라면 뒤의 두 단계는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첫째 단계인 에이카시아(eikasia)는 짐작, 또는 상상을 뜻하며, 의식적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에 대해 선입견, 편견으로 이해하므로 사회적으로 학습된 관습이나 전통에 얽매인 존재상태입니다.

예컨대 타인을 통해 알게 된 것들, 즉 신문이나 TV를 통한 뉴스나 정보, 그리고 자신의 환상이나 편견에 의해 왜곡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상태입니다.

그 대상은 그림자나 영상, 또는 반사물이라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림자는 실물의 나머지 부분은 다 사라져 버린 것으로 매우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것을 의미합니다. 대다수 사람은 이 원초적 단계에서 세계에 관해 더 참된 이해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상태 속에서 평생 살아갑니다.

물론 에이카시아는 나쁜 점만 있지 않고 약간의 진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술의 긍정적 효과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그림자나 반사물을 실제라고 간주할 때 환상이 생김으로써 해악이 나타납니다. 그림자를 그림자로 간주하는 한, 환상은 없습니다.

이 단계는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의 죄수들이 손발과 목이 사슬에 묶인 채 깜박거리는 인형들의 그림자만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평범한 일상적 의식은 주로 실제가 아닌 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영상과 환상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에 관한 왜곡된 피상적인 견해며, 사물의 참모습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막는 환영의 달콤한 베일입니다.

 

둘째 단계인 피스티스(pistis)는 확신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물과 직접 접촉하면 타인들을 통해서 알 때보다 훨씬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에 대해 외부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확신하되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상태입니다.

그 대상은 우리 주변의 동물, 식물, 제작물 등 물리적인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플라톤은 이 상태를 ‘이해가 모자란 참된 의견’이라고 부르며,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바른길을 가는 장님’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는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가 최초로 결박에서 벗어나 인형들과 모닥불을 보는 상태이며, 환상과 뜬소문 편견에 의해서 갖게 되었던 잘못된 선입관에서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인 디아노이아(dianoia)는 추론적 사고입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추론은 하지만, 내면으로 가지 않고 외부에서 답을 찾는 존재상태입니다. 사건을 부분적으로만 볼뿐 상호 연결된 관점으로 살피지 못합니다. 과학적인 사람이 수학적으로 사고할 때입니다.

동굴의 비유에서 햇빛이 비치는 동굴 밖 세계로 인도되어 사물들의 반사물과 그림자들을 보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인 노에시스(noesis, 또는 에피스테메)는 누스의 앎 또는 변증술입니다.

자신에게 반복되는 사건이나 현상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려고 내면으로 들어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존재상태입니다.

이 단계는 완전한 누스의 상태이며, 누스는 대상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아보는 반야를 말합니다. 감각의 대상을 이데아의 현시(顯示)로 보는 방식입니다. 대상은 이데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는 동굴의 비유에서 마침내 빛의 근원이자 사물들의 원인인 태양 자체, 즉 선의 이데아를 바라보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사물을 전체의 부분으로 이해하고, 전체의 맥락 속에서 서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변증술을 통해 누스는 일련의 이데아를 거쳐 위로 상승하며 궁극적으로 제일 원리인 선의 이데아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이 제일 원리에서 하강하여 지식의 모든 특수한 분야와 개별적인 요소들의 관계를 알아보게 됩니다.

 

⊖ 선(善)의 이데아

오늘날 선의 일반적 의미는 이타적 행동과 같은 선행으로 식별됩니다. 그러나 고대 희랍에서 선은 목적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선(善)이라는 뜻의 희랍어는 ‘아레테(arete)’입니다. ‘아레테’는 어떤 특정한 일에 있어서 능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레테는 사람에게만 적용되지도 않고, 도덕과 연관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종류의 사물에는 그 종류에 따라 훌륭한 상태(또는 좋은 상태)가 있으며, 이는 대개 그 종류의 기능(쓰임새) 또는 목적과 관련된 앎에 의존합니다.

가령 눈의 아레테는 잘 보는 것이고, 귀의 아레테는 잘 듣는 것이며, 제화공의 아레테는 좋은 구두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제화공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구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잘 사는 능력’으로서의 아레테인 삶의 아레테도 존재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이 세상에 왔는지 상기해내야 합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아는 것은, 삶의 마스터가 된다는 뜻이며, 삶을 마스터한 선한 사람은 자기 삶의 목적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장인)는 선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각자가 자신의 목적지로 잘 갈 수 있도록, 자기 삶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도우미의 역할을 합니다.

 

주우(宙宇) op@o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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