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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⑯…오월 전쟁ⓒ (토사구팽)

기사승인 2018.02.10  15: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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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 오월전쟁 편의 세 번째입니다. /편집자주

 

▲ 손봉균씨

 

(6)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쳐들어 감

 

한편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나갔다는 정보를 받았다. 월왕 구천은 범려와 상의하고 드디어 수군과 육군, 그리고 별도로 편성된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일제히 오나라로 쳐 들어갔다.

오나라 국내를 지키던 태자 우는 장수들과 함께 월나라를 막으면서 오왕 부차에게 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급한 소식을 받은 오왕 부차는 진나라를 겁박하여 대회를 빨리 끝냈다.

오왕 부차는 대회를 끝내자마자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로 돌아갔다. 오나라 군사들은 이미 자기 나라에 월나라가 쳐들어왔다는 걸 알고 모두 슬픔에 빠졌다. 더구나 그들은 먼 길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만큼 지칠 대로 지쳐서 싸울 용기마저 없었다.

오왕 부차는 피곤한 군사를 이끌고 허둥지둥 오나라로 돌아가서 월나라와 크게 싸웠다. 그러나 오나라 군사는 월나라 군사에게 대패했다. 오왕 부차는 태재 백비를 시켜 월왕 구천에게 오왕 부차가 월나라의 신하가 되기로 하고 화평을 애걸하였다.

범려가 건의했다. ‘아직 오나라를 아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화평을 맺고 백비에게 생색을 내게 해 줍시오. 앞으로 오나라가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항복을 받고 월나라로 돌아갔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 군사가 물러난 후로 더욱 주색에 빠지고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다. 더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오나라 민심은 자못 흉흉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이러한 형편을 잘 알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쳤다. 한편 오왕 부차는 월나라 군사가 또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모든 군사를 일으켜 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충신이면서 능력이 있었던 오자서는 죽고, 간신인 태재 백비가 실권을 갖고 있었던 오나라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즉, 월나라의 명신인 범려와 문종의 계책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태재 백비는 병들었다 핑계하고 숫제 나오지도 않았다.

전쟁에서 크게 패한 오왕 부차는 신하인 왕손 낙을 시켜 다시 화평을 청하게 하였다. 월왕 구천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화평을 허락하려고 했으나 범려가 엄숙히 말했다.

“왕께선 오나라를 치기 위하여 20년간이나 밤낮 없이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눈앞에 적을 두고서 왜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하십니까? 천부당만부당하신 생각입니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가 화평을 거절하고 오나라 성으로 쳐들어 왔다는 보고를 듣고 남양산으로 도망갔다.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 성으로 들어오자 제일 먼저 나가서 항복한 것은 태재 백비였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숨어 있는 그 근방 일대를 겹겹으로 포위했다. 오왕 부차는 글을 써서 화살에 꽂아 월나라 군사가 있는 쪽으로 쏘아 보냈다. 월나라 군사가 그 화살을 주워 범려에게 갔다 바쳤다. 그 글에 하였으되,

‘영리한 토끼를 잡고 나면 그 다음은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을 아오? 이와 마찬가지로 부려 먹을 대로 부려먹고 나서 쓸모가 없어지면 죽이는 것이 인간 세상이오. 이제 오나라가 망하면 그 다음은 범려, 문종 두 대부가 망할 차례요. 그러니 두 대부께서는 우리 오나라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주오. 그러는 것이 또한 두 대부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길인가 하오.‘(토사구팽<兎死拘烹>의 유래)

 

▲ 1965년에 발굴된 월왕 구천의 검. 호북성박물관 보관 /위키피디아

 

이에 문종이 답장을 써서 역시 화살에 꽂아 오왕 부차가 숨어 있는 쪽으로 쏘아 보냈다. 그 글에 하였으되, 오나라의 여섯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지난날에 하늘은 오나라에 우리 월나라를 내 줬건만 너는 받지 않았다. 이젠 하늘이 우리 월나라에게 오나라를 주시니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길 수 있겠느냐!’

오왕 부차는 다시 한 번 왕손 낙을 보내 화평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범려와 문종은 왕손 낙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월왕 구천은 왕손 낙이 울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월왕 구천이 한 장수를 불러,

“그대는 부차에게 가서 과인의 말을 전하여라. ‘내 지난날의 정리를 잊을 수 없어 특히 용동 땅으로 너를 보내 줄 테니 그 곳에 가서 5백 집(家)만 거느리고 살다가 일생을 마치거라’ 고 하여라”

그 장수는 오왕 부차에게 가서 월왕 구천의 말을 전하였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사직과 종묘를 아주 없애버릴 생각인 것을 알고는 자살 했다. 오왕 부차가 죽기 전에 좌우사람에게 유언한다.

“만일 죽어서도 이승에서처럼 아는 것이 있다면 내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오자서를 대하리오. 내 죽은 후에 비단으로 나의 얼굴을 세 겹만 싸다오.”

 

(7) 전쟁 승리 후 월나라에서 일어난 일들

 

월왕 구천은 고소성에 들어가서 오나라 궁성을 차지했다. 모든 신하와 문무백관들이 월왕 구천에게 하례를 드린다. 그들 문무백관 속에 태재 백비는 섞여서 의젓이 뽑냈다. 그는 지난날 여러 가지로 월나라 형편을 도와 줬다해서 쪼를 빼고 생색을 냈다.

월왕 구천이 백비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오나라 태재다. 그러니 과인은 그대와 서로 상종할 수가 없구나! 너의 임금이 지금 양산에 누워 있는데 어째서 너의 임금 곁으로 가지 않냐뇨?”

월왕 구천은 군사를 시켜 태재 백비를 당장 쳐 죽이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백비를 죽인 것은 충신 오자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월왕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서주 땅으로 가서 드디어 제(齊), 진(晉), 송(宋), 노(魯) 네나라 군후와 회견하고 대회를 열었다. 연후에 월왕 구천은 주(周) 왕실로 사람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조례했다. 주 원왕은 월왕 구천에게 곤포와 면관을 보내 패자로서 인정했다. 월왕 구천은 동방의 백주가 되고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문대에서 잔치를 베풀고 모든 신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었다.

악사가 나와서 거문고를 타면서 새로 지은 승전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는 ‘월왕 구천의 탁월한 지도력과 신하들의 노력으로 승전했으며, 아울러 월나라는 공로 있는 자에게 상을 아끼는 일이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노래를 듣고 참석한 신하들은 모두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의 얼굴엔 기쁜 빛이 없었다.

범려가 속으로 탄식한다.

‘월왕이 모든 공로를 독차지하려고 하는구나! 신하들을 의심하고 시기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튿날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가서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사의를 재고해보라고 하였다. “과인은 그대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 성공하였음이라. 장차 그대의 공로에 보답하려고 하는 데 그대는 어떨게 과인을 버리고 떠나려 하오? 그대가 안 떠난다면 과인은 그대와 함께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그대가 떠난다면 과인은 그대와 처자를 도륙하리라!”

범려가 대답한다. “죽으면 신이 죽었지 신의 처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살리고 죽이는 것은 다 대왕의 처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의 알 바 아닙니다”

그날 밤에 범려는 조그만 일엽편주를 타고 삼강을 건너 오호로 들어갔다. 이 날 문종은 범려가 사람을 시켜 보낸 서신을 받았다. 문종이 서신을 뜯어 본 즉 바로 범려가 친필로 쓴 편지였다.

「그대는 지난날 오왕 부차의 말을 기억하시는가. 죽기 전에 오왕 부차는 우리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글에 하였으되 ‘영리한 토끼를 잡고나면 그 다음은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을 아오. 이와 마찬가지로 부려 먹을 대로 부려먹고 나서 쓸모가 없어지면 죽이는 것이 인간 세상이오. 이제 오나라가 망하면 그 다음은 범려, 문종 두 대부가 망할 차례요!’하고 말했소(토사구팽<兎死拘烹>의 유래, 이 때문에 사전에 보면 범려가 문종에게 한 이야기로 나온다). 이제야 말하지만 월왕의 상호를 보건대 그는 목이 길어서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하오. 특히 참는 힘만은 대단한 사람이오. 그러므로, 고생은 같이 할수 있으나 함께 부귀를 누릴 인물은 못 되오. 그대가 지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행을 면치 못하리이다」.

편지를 읽은 문종은 종일 우울했다. 그러나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는 못 했다.

월왕 구천은 군사를 거느리고 미인 서시를 데리고 월나라로 돌아왔다. 월부인은 월왕 구천이 서시를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듣고 심복 부하 한 사람에게 비밀히 지시하여 서시를 납치하였다. 그 심복 부하는 서시의 등에다 큰 바위를 묶어 강물에 던져 서시를 죽였다. 이리하여 서시는 월부인 때문에 무참히 죽었다.

이튿날 심복 부하로부터 서시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월부인은 ‘이제야 나라를 망친 요물을 없앴으니 마음이 놓이는 구나’고 하였다.

 

한편 범려는 오호(五湖)에서 노닐다가 바다로 나갔다. 그 후 범려는 월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아내와 아들을 데려 왔다. 그리고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치이는 말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다. 지난날에 오자서가 치이(말가죽)에 싸여 강물에 버려진 것을 잊지 못하고 자기를 또한 오자서에 비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라고 이름을 고치고 상경 벼슬을 살다가 얼마 후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 도산(陶山)에 들어가 목축을 했다.

그는 목축을 하고 식리를 해서 천금을 벌었다. 연후에 범려는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부자 되는 법을 기록한 책을 말할 때 도주공이 남긴 술법이라고 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켰건만 공로 있는 신하에게 한 치 땅의 상도 주기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신하들을 멀리 했다. 그래서 옛 신하들은 점점 월왕 구천을 만나 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문종은 그럴 때마다 범려가 떠나면서 자기에게 보낸 그 서신을 생각하곤 했다. 드디어 문종도 병들었다 핑계대고 월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부터 문종을 좋아하지 않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이 좌우에서 월왕 구천에게 참소한다. ‘문종은 자기의 공로가 크건만 대왕이 상을 주지 않는다 해서 늘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궁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월왕 구천은 문종의 뛰어난 재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출중한 인물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날이면 막아 낼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월왕 구천은 문종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월왕 구천은 문종을 문병하러 그 집으로 행차했다.

월왕 구천이 문종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일곱 가지 재주가 있는 데 나는 그 중에서 세 가지를 써서 이미 오나라를 무찔렀음이라. 그대는 나머지 네 가지 재주를 어데다 쓸 생각이요?”

문종이 대답한다. “신은 쓸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월왕 구천이 말했다.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그 나머지 네 가지 재주를 저 세상으로 가 버린 오나라 사람에게 써 주오.” 그리고는 촉루검을 남겨놓고 궁으로 돌아갔다(자살하라는 뜻이다).

문종은 촉루검으로 자살 했다.

 

▲ 1965년에 발굴된 월왕 구천의 검. 호북성박물관 보관 /위키피디아

 

문종이 죽고 1년이 지난 후 해일이 넘쳐 들어와 문종이 묻혀 있는 와룡산을 뚫고 마을을 휩쓸었다. 안전지대로 피해간 촌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빠져나가는 해일을 따라 오자서와 문종이 앞뒤로 물결을 타고 어디론지 가고 있었다. 지금도 전단강에 바다 조수가 밀려 올 때면 사람들은 ‘앞의 물결은 오자서요. 뒤 따라 가는 저 물결은 문종’이라고 말한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손봉균 op@o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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