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광해군 중립외교론의 허구①…식민사관서 출발

기사승인 2018.02.02  14:21:32

공유
default_news_ad1

- 당시 후금은 만주 일부 차지한 약체…결전 의식 가졌어야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는 과연 중립외교를 펼친 임금일까. 그의 외교는 올바른 정책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식자층 사이에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친 훌륭한 임금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중국 권력 교체기에 광해군이 명(明)도, 청(淸)도 아닌, 조선을 위한 외교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중립외교는 강대국 한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각 나라에 같은 비중을 두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최근 역사를 강의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학자들, 언론사 칼럼니스트들 사이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언급하는 빈도가 잦다.

이런 분위기는 작금의 국제상황 전개와 우리 외교의 방향 전환에 기인한다. 미국에 치우쳤던 외교의 중심을 중국과 미국 사이 중간쯤의 위치로 클릭 이동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역사에서 그 힌트를 찾다 보니 광해군을 발견한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은 앞서 한반도 균형자론을 거론하던 노무현 대통령 때 부상했고, 다시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이 나오면서 다시 떠오고 있다.

그러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은 언제 나왔으며, 광해군은 정말 중립외교를 펼쳤을까. 그의 외교는 성공한 것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충분한 뒷받침 없이,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취하다 서인 패당에게 쫓겨난 불쌍한 임금으로 추앙하는 기류마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몇가지 의문점을 풀어 나가면서 중립외교의 심볼로 굳어지고 있는 광해군에 대한 오류를 짚어보자.

 

1. 광해군 중립외교론의 시발은 어디인가.

 

역사학자 한명기는 저서 「광해군」(2000년 간)에서 우리 교과서에 광해군을 탁월한 외교전문가로 부각시킨 근거로 1959년 발표된 이병도의 글이라고 지적했다. 이병도는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이란 논문에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적 외교정책을 취했다고 추켜 세웠다. 이후 대부분의 국사 개설서에서 광해군에 대한 이병도의 긍정적 시각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병도의 논리는 일제시대에 한국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들의 논지를 따른 것이라고 한병기는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와 다카와 고조(田川孝三)라고 한다.

특히 이나바는 1933년 ‘광해군 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교토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정도로 깊이 연구했다. 이나바는 이 논문에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으며, 택민(澤民)주의자였다고 찬양했다. 당시 신하들은 광해군과 달리 명의 편에서 후금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명분론자였다고 이나바는 지적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나바의 지도를 받았던 조선인 홍희(洪憙)도 ‘패주 광해군론’(1935년)에서 광해군은 별다른 과오가 없었음에도 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조반정의 주체들의 권력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옹호했다.

한명기는 이나바가 광해군을 옹호한 것은 그가 만선(滿鮮)사관론자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만선사관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에 만들어진 사관으로, 역사적으로 조선과 만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만주와 조선을 중국의 관할에서 떼어 놓으려는, 일종의 식민사관이었다. 이 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만주에서 신흥국(후금)이 일어설 때 광해군이 중원의 명과 등거리정책을 취함으로써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나바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선통제)를 만주국 황제로 복위시켜 멸망한 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사관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일제말기, 만주에 괴뢰국을 수립해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제의 사학자들의 시각에서 광해군을 뛰운 것이지, 한국적 관점에서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다. 일본 사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광해군 옹호론이 이병도로 이어지다가 최근에 새로운 국제상황을 맞아 다시 부각된 것이다.

 

▲ 건국당시(1616년) 후금의 영토 /김인영

 

2. 광해군 시기에 후금이 그렇게 강했나

 

광해군의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 15년간이다.

이 시기에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 만큼 후금이 명나라와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광해군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결론을 알고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정책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명나라는 후금(나중에 청)에 의해 멸망했다. 답을 알고 시험 치면 틀리는 사람이 바보다.

하지만 광해군 시대에 후금이 명나라를 제압할 것으로 판단한 사람이 있었을까.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당시 누르하치는 지금 지린성(吉林省) 백두산 일대의 부족장에 불과했다. 25년전인 1583년 명나라 요동총관 이성량(李成梁)의 지시를 받아 또다른 여진족을 공격하러 나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사건을 가슴 속에 묻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요동도사로부터 받은 무역허가장(칙서)를 가지고 인삼과 말을 교역하던 상인으로, 재화를 축적해 군비를 늘려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1592~98년)의 후유증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기진맥진한 틈을 타서 1599년 해서여진의 한 부족 하다(哈達)를 얻은데 이어 1607년 또다른 부족 후이파(輝發) 병합했다.

이 무렵 명나라 요동지역에서 지휘관 교체가 발생한다. 조선 출신으로 임진왜란때 참전한 이여송(李如松) 장군의 아버지이기도 한 명나라 요동총관 이성량이 광해군이 등극한 해에 파면되었다. 요동의 권력 교체기를 노려 누르하치는 1613년 부족 우라(烏拉) 병합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르하치는 지린성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후룬국(忽剌國)이라 불리던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족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예허(葉赫)는 명나라에 복속해 누르하치에 대항하고 있었다.

1616 누르하치는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 후금)이라 정하고 스스로를 칸이라 칭하며 나라를 세웠다. 이어 2년후 1618년 7대한 격문 발표하며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까지 후금은 애송이 국가였다. 요동의 주요 지역은 명나라가 차지했고, 누르하치는 여진족도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3. 결전의식 있었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해(1618)에, 광해군에게 재위 10년째에 접어든다. 즉위 후 북방이 요동을 치는 10년간의 긴 기간 동안에 광해군은 무엇을 했을까.

광해군은 전쟁을 경험한 군주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었다.

195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다급해진 선조 임금은 전쟁 발발 보름만에 둘째 아들 광해군을 왕제자로 책봉해 분조를 이끌게 했다. 선조는 하시라도 명나라로 도망갈 태세로 평안도에 머물면서 세자에게는 전국을 돌며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18살의 광해군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를 돌며 전투를 독려했고, 서울로 돌아온후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았다. 무려 27개월 동안 풍찬노숙을 하며 전국 구석구석까지 다녔다. 조선조 27명의 임금 중 광해군만큼 전국토를 돌며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참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 했다. 전쟁은 왕실에게도 고통을 주지만, 백성들에게는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전쟁을 피하는 것은 무조건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일개 사대부나 백성이 아닌, 임금이라면, 나라의 군사력을 키우고, 적과 한번 붙자는 배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광해군은 그럴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광해군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때는 이미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이 지났고, 즉위후 10년이란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초에 여진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친히 전투 훈련을 참관하고 방어진지를 점검했다. 누르하치의 철기군에 대항할 무기는 화포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813년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고, 파진포(破陣砲)등 각동 화포를 생산케 했다. 그리고 변방 수령을 대부분 무신으로 임명하고 나름 병력도 확충했다.

하지만 광해군에겐 결전의식이 부족했다. 그에게 주어진 10년의 세월은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모 등 정적 제거에 몰두하고 궁궐 건설등 토목공사에 국력을 소진하는데 주력했다. 전쟁에 대비하는 의식이 있었다면, 국론을 통합하고 전쟁재원을 확보해야 했었다.

광해군은 그에게 주어진 10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1619년 명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파병을 결정한다. 파병 후에도 후금이라는 독버섯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야 했음에도 불리하면 투항하라고 몰래 지시한다.

광해군 옹호론자들은 이를 중립외교라고 칭찬한다. 이때는 중립외교를 취할 때가 아니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력을 합치면 지린성의 야만 부족 정도는 제압할 수 있었다. 광해군이 강홍립(姜弘立)에게 불리하면 투항하라고 지시한 것은 국제관계를 냉철히 판단한 결과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전쟁에 대한 공포심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 초상화 /위키피디아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