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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열풍으로 본 한-베트남 역사적 인연

기사승인 2018.01.29  12: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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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자 교류, 베트남 왕자 망명… 정약용에 빠진 호치민, 사돈의 나라

 

박항서(59) 감독이 베트남 축구팀을 세계 U-23 세계대회 준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베트남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는 뉴스가 한국사람들에게도 흐믓하게 들려 왔다. 그는 ‘베트남의 히딩크’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가 귀국한 28일 베트남 공항에는 수천명이 몰려와 환영했다. 베트남 국가주석은 대표팀에 1급 노동훈장을, 박 감독과 미드필더와 골 키퍼에겐 3급 노동훈장을 각각 주기로 했다고 한다.

 

▲ 박항서 감독 페이스북 사진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애증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우리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해 지금의 베트남정부와 전투를 벌였다. 대한민국과 베트남과의 관계는 1956년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그 베트남(월남)은 1975년 패망하고, 현재의 베트남(월맹)과는 1992년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했다.

공식 외교에 앞서 우리와 베트남의 역사는 천년을 이어왔다. 두 나라 유학자들은 베이징에서 유학 대결을 벌였고, 베트남 왕자가 우리나라에 망명해와 지금도 가문을 형성하고 있다.

▲ 베트남 건국 영웅 호 치 민 /위키피디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던 시절에 한국과 베트남은 복쪽과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역사의 끈을 맺어왔다. 두 나라 역사는 너무나 흡사하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때론 적대적이고, 때론 조공·책봉의 화해관계를 맺어온 것도 같다.

베트남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호 치 민(Ho Chi Minh, 胡志明)은 젊은 시절에 조선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는 정약용의 문집에 심취해 정약용 기일에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호 치 민은 목민심서를 47번이나 읽어 나중엔 책이 흐늘흐늘해 졌다고 한다.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도 그는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① 유교로 맺어진 한-베트남의 돈독한 관계

 

한국과 베트남은 유교를 공유하고 있다. 유교는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나라를 맺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기록상 가장 먼저 베트남과 한국 역사가 만나는 시기는 고려말이었다. 베트남과 고려는 몽골과 기나긴 항전을 벌였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두 나라 모두 지쳤다. 쿠빌라이(元 세조)가 베트남을 공격할 무렵,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청했고, 이어 베트남도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나라는 원나라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1308년 베트남(대월)과 고려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서 만났다. 당시 베트남에서 최고의 유학자 막 단 찌(Mac Dinh Chi, 莫挺之)가 연경에 도착했다. 때마침 고려 사절단도 연경에 머물렀다. 두 사절단은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필담이 가능했다.

원나라 황제는 각국 사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정에서 두 나라 사절에게 한시 실력을 겨루게 했다. (이 이야기는 베트남에서 널리 퍼져 있다. 베트남에서는 이 시합에서 원 황제가 막 단 찌에게 손을 들어주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사신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조선초기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안남국 사신을 만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성종실록』 19년 12월 24일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서거정이 사은사(師恩使)로 부경(赴京)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베트남)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을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李睟光)은 베트남 레 왕조에서 온 풍 칵 꽌(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만났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에게 명 황제에게 바치는 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도 써 주었다. 고국에 돌아간 풍 칵 꽌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진주 출신 유생이 정유재란 때 일본 사쓰마(가고시마)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교토 상인에게 팔려간다. 그는 교토 상인을 따라 필리핀, 베트남 등지를 따라 다니다가 베트남 고관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한다. 베트남 고관은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책을 하나 꺼내면서 “이 책은 당신네 나라 이지봉(이수광)이 쓴 시인데, 당신은 알겠지요“라고 묻는다. 조완벽은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하자 베트남 고관이 서운해 하며 그 책자를 보여줬다. 조완벽이 그 책을 보니, 첫머리에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다.

베트남 고관은 또다른 책을 꺼내면서 “이 책은 귀국 이지봉이 쓴 책인데,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이수광의 시를 외우고 있더라고 전한다.

그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10년만에 돌아와 이런 사실을 전했다. 조완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트남에는 글 읽기를 숭상하여 이곳저곳에 학당이 있어 아이들이 고전을 외우고 시문도 익혔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선 성종 때 사신으로 간 조신(曺伸) 연경에서 베트남 사신 레 티 꺼((Le Thi Cu, 黎時擧)과 시를 주고 받은 일이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수록돼 있다.

또 베트남 대학자 레 꾸이 돈(Le Quy Don 黎貴惇)도 유명하다. 그는 1760~1762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 사신 홍계희를 만나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베트남에 남아있다.

 

▲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의 모습을 조선 사신이 그린 그림. /나무위키

 

② 고려로 망명한 베트남 왕자와 그 후손들

 

베트남 왕자가 고려로 망명해 이 땅에서 씨를 뿌린 경우도 있다. 화산·정선 이씨다.

베트남 리(李) 왕조(1009-1225) 말기, 권력이 외척인 쩐 투 도(陳守度)에게 넘어갔다. 쩐 투 도를 중심으로 한 쩐씨 일당은 책략에 의해 리 왕조의 8대 임금 혜종을 자살케 하고, 혜종의 어린 딸을 앞세워 왕권을 찬탈했다. 1225년의 일이다. 왕위를 찬탈하고 새 왕조를 세운 쩐씨들은 구왕조였던 리(李)씨 일족을 몰살시키려고 했다.

1226년 쩐 왕조의 복수가 휘몰아치자 리(李)씨 일족들은 황급히 도망을 갔다. 리 왕조의 6대 황제 영종 리 티엔 도(李天祚)의 일곱 번째 아들인 리 롱 뜨엉(李龍祥, 이용상)은 급히 배를 구해 일족을 이끌고 중국 송나라로 망명했다.

이용상과 그 일행을 실은 배는 송나라로 가는 도중에 바다에서 표류했다. 계절풍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도착한 곳이 한반도 서해안 옹진반도의 창린도(猖麟島)였다. 베트남에서 한반도까지의 거리는 3,600여km, 지금 비행기로 5시간의 거리를 표류했으니, 이들의 탈출은 필사적이었다. 얼마나 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죽느냐, 사느냐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구사일생으로 한반도의 어느 바닷가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베트남 보트피플이다. 베트남 난민들은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로 옮겨 거주했다.

당시 고려 임금은 고종(재위 1213년∼1259년)이었다. 고려 조정이 이들을 필담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용상이 안남국 왕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곧이어 몽골(元)이 침략하자 베트남 이주민들은 전투에 참가해 몽골군을 무찔렀고, 이에 고려는 이용상을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고려 여인과 결혼시키고, 일대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며 정착하도록 도왔다. 고려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李씨의 본관을 화산으로 삼게 했다. 화산 이씨의 스토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 화산이씨 종문 /위키피디아

옹진에 정착한 이용상은 북면(北面) 봉소리(鳳所里) 동쪽 원추형 산위에 쌓은 화산성(花山城)에 올라가 망국단(望國壇)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도 황해도 옹진군 화산 인근에 이용상 왕자의 행적을 전하는 유적이 있다고 한다. 몽골군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과 망국단, 리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와 베트남의 중국식 명칭(交趾)을 딴 교지리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230여 가구, 1,7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이 있는 황해도의 집성촌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선 이씨도 베트남에서 온 귀화성씨다.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李陽焜, 리 즈엉 꼰)은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보다 먼저 고려에 입국했다.

이양흔은 베트남 리 왕조의 4대 인종(李乾德, 재위 : 1072년 ~ 1128년)의 셋째 아들이자, 제5대 황제 신종(李陽煥, 재위 : 1128년 ~ 1138년)의 동생이다. 이양흔은 형과 왕위를 다투다가 송나라로 망명했고, 그후 송 휘종 때 금나라가 송을 공격하자 전란을 피해 1127년에 고려로 망명해 경주에 정착했다.

정선 이씨들은 고려 무신란의 주역인 이의민(李義旼)이 이양흔의 6세손이라고 주장한다. 이의민이 또다른 무신 최충헌(崔忠獻)에게 화를 입게 되었고, 그의 후손중 9세손 이우원(李遇元)이 강원도 정선으로 낙향해 가문을 이루어 본관을 정선으로 했다고 한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정선이씨는 1,121가구 총 3,65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③ 사돈의 나라로 가까워진 한·베트남

 

쩐 왕조에 의해 리 왕조의 지배층을 몰살했기 때문에 리 왕조의 후손은 현지 베트남에는 남아있지 않고 한국에만 남아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열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돈의 나라'로 부른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을 포함해 한국에 체류하는 베트남인은 13만명이나 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88만명 가운데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다.

결혼 이주민 가운데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의 가족이 가장 평안하다는 얘기가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유교가 맺어온 문화적 공통점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한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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