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유일의 백인 왕조…사라와크 브룩 왕가
상태바
동남아 유일의 백인 왕조…사라와크 브룩 왕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25 1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임스 브룩이 브루나이 왕가로부터 주권 이양받아 3대 걸쳐 통치

 

동남아시아 역사에 유일한 백인 왕조가 있었다. 보르네오섬 사라와크(Sarawak)주를 다스리던 영국계 브룩(Brooke) 왕조다. 브룩 왕조는 2차 대전 직후에 몰락하고, 사라와크주는 현재 말레이시아 연방에 속해 있다.

시조는 제임스 브룩(James Brooke, 1803. 4. 29~1868)이다. 1841년부터 1946년까지 3대에 걸쳐 사라와크를 통치하다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었다.

 

▲ 보르네오섬 사라와크 /위키피디아

 

제임스 브룩은 1803년 영국령 인도 캘커타에서 가까운 반델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12살에 영국으로 돌아가 몇 년간 학교에 다녔지만 중퇴하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 사라와크 브룩 왕가의 창시자 제임스 브룩 /위키피디아

1819년 인도로 돌아가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벵골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그의 군 생활은 불행했다. 영국-미얀마 전쟁에 종군해 아샘 지방에서 공을 세웠지만, 1825년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요양을 위해 영국에 돌아갔다. 1930년 치료를 마치고 인도 마드라스로 갔지만, 동인도 군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전역을 하게 된다. 전역후 제임스는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무역업을 해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탐험을 하고 싶었다. 183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3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상속받았다. 그는 그 돈으로 범선 로얄리스트(Royalist)호를 구입했다.

이 범선은 142톤으로, 30년전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을 물리칠 때 투입한 전함과 동등한 급수였다. 왕립요트협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 배는 영국 해군기(White Ensign)를 게양하고 영국 해군으로서의 권리도 부여받고 있었다. 로얄리스트호는 대포를 비롯해 중화기를 장착한 개인 전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 섬들을 탐험한 후에 지중해를 여행할 생각이었다.

1838년 8월, 제임스는 이 배에 올라타 보르네오섬의 쿠충(Kuching)이란 곳으로 갔다. 쿠충은 사라와크주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나중에 사라와크의 수도가 된다.)

보르네오섬은 토착 브루나이 왕조가 14세기 후반부터 다스리고 있었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이 왕조는 왕을 술탄(sultan)이라 불렀다. 제임스가 쿠충에 도착할 무렵엔 23대 오마 알리 사이푸딘 2세(Omar Ali Saifuddin II)가 재위에 올라 있었다.

 

▲ 제임스 브룩의 함대와 해적들과의 전투 /위키피디아

 

마침 사라와크에선 브루나이 왕가에 저항하는 해적 반란이 일어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제임스가 쿠충에 입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브루나이 술탄의 삼촌이자, 섭정이었던 무다 하심( Muda Hashim)이 만나자고 제의를 해왔다. 무다는 제임스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제임스는 적극 돕겠다고 약속하고 로얄리스트호를 반군 토벌에 투입했다.

말레이 해협에서 해적질을 하던 무리들은 로얄리스트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제임스의 도움으로 해적들이 소탕되자, 브루나이 술탄은 기뻐했다. 하지만 브루나이 귀족 중에는 제임스의 승리를 질투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무다 하심과 그의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일으켰다. 제임스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제압하지 못하고 중국에 주둔하던 영국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덕분에 술탄은 다시 왕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1841년 브루나이 술탄은 고마움의 표시로 사라와크의 통치권을 제임스에게 이양했다. 제임스는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사라와크 영지를 넓혀 갔다. 제임스는 1841년에 북(北)보르네오의 라부안(Labuan) 섬을 점령해 영국에 상납했다.

제임스는 형식적으로는 브루나이 술탄의 속국을 자처하며 왕의 칭호로 술탄(sultan)보다 한 등급 낮은 라자(Rajah)를 사용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브루나이 왕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라와크를 지배했다.

영국 정부는 1846년에 제임스에게 라부안 섬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다음해에 기사(Knighthood) 작위를 내렸다. 제임스는 사라와크 왕이자 라부안 총독이 되었고, 영국으로선 자국 시민이 통치하는 사라와크를 보호령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탐험을 좋아 했다. 1852년에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를 만나 8년에 걸쳐 동남이 알대 섬들을 탐험하며 식생 조사를 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왕위를 조카 찰스 브룩에게 위임하고 영국에 돌아가 1868년 사망했다.

 

▲ 브룩 왕조…좌로부터 1대 제임스, 2대 찰스, 3대 바이너 /위키피디아

 

제임스가 백인 왕조(White Rajahs)를 창시하고 영토를 확장했다면, 그를 이은 찰스는 사라와크를 질적으로 발전시켰다. 찰스는 병원을 지어 원주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한편 요새를 지어 국경 수비를 강화했다.

1917년 찰스가 죽고 그의 아들 바이너 브룩(Charles Vyner Brooke)이 3대 왕(라자)에 즉위했다. 바인은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고 이슬람등 현지인들의 종교를 육성했다. 백인 왕조의 현지화인 셈이다.

하지만 브룩 왕조는 3대에서 종언을 고한다. 1941년 12월 25일 일본군이 사라와크에 진입하면서 3대 왕 바이너는 호주 시드니로 피신했다. 바이너는 2차 대전이 끝날때까지 시드니에 머물렀다.

 

일본군은 사라와크를 점령한 후 브룩 왕조의 행정 조직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 중요한 자리는 일본인을 배치했다. 이 괴뢰 정부는 1945년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군이 진주하면서 붕괴된다.

곧이어 영국군이 진주해 사라와크에 군정을 실시한다. 호주로 피신갔던 브룩 왕조의 마지막 왕 바이너가 귀국하지만 더 이상 사라와크를 통치할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주권을 영국에 이양하기로 하고, 사라와크 의회에 관련 법안을 제출했다. 1946년 법안이 의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사라와크 주권을 영국에 넘겨주는 법안에 항의해 수백명의 공무원들이 집단사표를 냈고, 드디어 영국 정부가 파견한 사라와크 총독 던컨 스튜어트(Duncan Stewart) 경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946년 7월 사라와크를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브룩 왕가의 왕세자 격인 앤서니 브룩은 주권 이양에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추방되었다.

한편 말레이시아에서는 현지인들에 의해 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독립운동가들은 사라와크를 연방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1961년 5월 27일 말레이시아 연방은 사라와크를 하나의 주로 편입시켰다.

브루나이와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 독립했다. 브룩 왕조에게 주권을 양도한 사라와크주는 현재 브루나이 왕국의 영토보다 넓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