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이야기①…은둔의 조선 서양에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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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이야기①…은둔의 조선 서양에 알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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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조선 억류생활 소개…왕실 근위대 근무하다 강진에 유배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은 우리에게 조선 효종 때 제주도에 표착해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덜란드인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해 1666년 9월 4일 여수에서 탈출할 때까지 13년간 조선 땅에서의 억류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일지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그 외 여러 문집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그는 탈출 후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 1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에서의 13년간을 정리한 일지를 썼다. 그가 일지를 쓴 것은 조선 땅에 억류된 기간의 봉급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지는 필사본 형태로 귀국하는 일행의 손에 건네져 네덜란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보고서는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두 종류의 책으로 출판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이라는 은둔의 나라가 이 책으로 하여 서양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그의 일지는 여러 이름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당시의 출판시장 사정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 강준석저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표지 그림

 

① 자카르타에서 나가사키로 출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Gorcum)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호르큄은 라인강 지류로 일찍이 선박 왕래가 잦고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취직해 본사가 있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가 서기(書記)가 되었다.

바타비야 근무 3년째가 되던 1653년 하멜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타고 대만으로 향했다. 7월 30일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출항했다. 배에는 목향 2만근, 명반 2만근, 용뇌, 대만산 녹피(사슴가죽) 2만장, 영양가죽 3천장, 산양가죽 3천장, 설탕 9만근 등 일본과 거래할 화물이 가득했다.

 

② 제주에 표착

일본으로 향하던중 태풍을 만났다. 닷새 동안 악전고투 한 끝에 배는 부서졌고,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했다. 표착지는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면 해안이다.

승무원 64명중 28명이 죽고 36명만 살아 남았다. 선장도 죽어 뭍에 묻었다. 곧이어 제주도 관리들이 나타나, 살아남은 선원들은 제주목사의 관청으로 끌려가 감금된다.

제주목사(이원진)가 조정에 남만인(南蠻人)의 표착 사실을 보고하고, 임금(효종)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때 한양에서 내려온 사람이 앞서 조선에 표착해 귀화한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朴燕)이다. 본명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

제주목사는 박연을 소개하며, “이 사람이 누군줄 아느냐”고 물었다. 억류된 선원들은 “우리와 같은 화란인이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제주목사는 “이 사람은 코레시안(Coresian)이다”고 했다. 그는 귀화한 조선인이었다.

박연은 처음에 화란어가 서툴렀다고 했다. 1627년에 표착해 26년간이나 조선에 살았으므로 모국어를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달가량 함께 지내면서 박연은 네덜란드어를 회복해 원활하게 통역했다고 하멜은 기술했다.

하지만 박연은 그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박연은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소. 그 대신 당신들을 보살펴 주고 식량과 의복도 지급해 줄 것이니, 이 나라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할 거요”라고 말했다.

 

▲ 하멜 이동로 /그래픽=김인영

 

③ 서울로 송환, 왕실 근위대 복무

박연이 떠나고 하맬과 일행들은 어선을 훔쳐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들은 제주도에 10개월간 억류되어 있다가 이듬해인 1654년 6월에 한양으로 소환되었다. 하멜은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이들의 경로는 제주-해남-영암-나주-장성-입암산성-정읍-태인-금구-전주-여산-은진-연산-공주-서울이었다.

한양에 올라 가는 길에 일행중 1명이 병사했다. 서울에서 일행은 효종임금을 알현했다. 통역은 박연이 맡았다.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 동포를 만나 다시 고국에 돌아갈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효종은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법도가 아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 곳에 살아야 하며, 그 대신에 의식주는 돌보아 주겠노라”라고 대답했다.

그런 뒤 효종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라고 명했다. 그들은 억지춘향 격으로 임금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했다. 그리고 얻은 것은 1인당 포목 2필씩이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임금의 호위병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달에 70근의 쌀을 지급받았고, 나무로 만든 소패(小牌, 호패)도 받았다. 거기에는 이름과 나이, 출신국, 근무쳐가 새겨져 있었다. 정식으로 훈련도감 소속 군인이 된 것이다. 국왕이 행차할 때 이들은 수행원으로 따라다녔다. 효종 임금으로선 외국 군대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 체류 시절에 이들은 서양인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조선백성들에게 시달렸다고 하멜은 적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무얼 마실 때 코를 돌려 귀의 뒤쪽에 갖다 놓는다는 것이며, 머리가 금발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이라기보다는 물속의 괴물에 더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은 흰 살결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처음 한동안 구경꾼 때문에 속소 부근의 골목 길을 거의 나다닐 수가 없었고 … ”

 

④ 청나라 칙사에게 구명운동

그러다 청나라 칙사가 왔을 때 사단이 났다. 일행중 두 사람이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길을 막아서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홍제동 근처였다. 조선 조정은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사신의 입을 다물게 하고, 두명의 선원을 격리조치했다. 두명은 나중에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하멜은 사형당했는지 여부는 알길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멜 일행은 청나라 사신과 접근할수 없는 곳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⑤ 강진으로 유배

1656년 3월 네덜란드 선원들은 서울을 떠나 올라 올때의 반대방향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영암에서 길을 바꿔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옮겨졌다. 남은 33명은 강진에서 1663년 2월까지 7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처음에는 한 곳에 수용되었으나, 나중엔 모두 자기집을 장만해 살게 된다. 생활은 국왕이 매달 지급하는 쌀 50근으로 충분했다. 강진생활에서 특히 승려들과 가깝게 지냈다. 불교에 감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외된 인간들의 동변상련이었다. 하멜 일행은 구걸행각을 하고, 산에 가 나무를 해 팔기도 했고, 배를 사서 솜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은 책임자인 병사(兵使)가 바뀔 때마다 달랐다. 하멜은 ‘좋은 사령관’과 ‘나쁜 사령관’으로 분류했다. 나쁜 사령관이 병사로 오면 월동에 필요한 옷가지를 주지 않아 날마다 나무 하러 다녀야 했고, 좋은 사령관이 부임해 오면 교대로 외출하는 것도 허락받았다.

이때 조선에 3년간 대가뭄이 찾아왔다. 혹심한 가뭄으로 수천명이 굶어 죽었고, 길에는 강도들이 들끓었다고 하멜은 서술했다. 국가 창고가 곳곳에서 파괴되어 양곡이 약탈당했으며, 평민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해나갔다. 전염병도 창궐했다. 하멜은 대기근으로 인한 조선 백성들의 어려움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⑥ 좌수영에 배치

흉년이 3년간 계속되자 하멜 일행은 분산 수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멜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흉년으로 강진 병영에서 일행을 모두 먹여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1663년 2월 남은 22명 가운데 좌수영(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 배정되었다. 강진에 내려올 때 33명이었지만, 22명이 남았다. 강진에서 11명이 죽었는데, 하멜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대기근때 전염병에 죽거나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멜은 여수의 좌수영에 배치되었다. 좌수영에서 하멜 일행은 고된 노역에 시달렸다. 좌수영의 수사(水使)는 일행을 정말 많이 괴롭혔다고 하멜은 적고 있다.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에서, 겨울에는 비가 오든 싸락눈이 오든 함박눈이 오든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마당에 서있게 했다.

이 수사가 전출되고 새로운 수사는 비교적 온화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새로운 자리로 이동하고 더 가혹한 수사가 왔다. 그는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양반이나 평민이나 예외없이 곤장을 때려 사람을 죽게 했다. 하멜은 어떤 상사가 오느냐에 따라 그들의 생활이 편할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⑦ 13년만에 탈출

1666년 하멜 일행은 탈출을 결심했다. 탈출을 주도한 사람은 좌수영에 배치되어 있던 선원들이었다. 이들은 순천에 살고 있던 2명을 합쳐 8명을 규합했다. 그들은 근검절약을 해서 배를 구입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모은 돈이 꽤 되자 큰 배를 사기 위해 친한 조선인들을 앞세웠다. 감독을 맡고 있던 관청에는 먼 곳에 솜을 사러 간다고 핑계를 댔다. 적당한 배가 물색되었다. 그러나 배 주인이 구매자가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후환을 두려워 팔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하멜 일행은 두 배로 값을 쳐주고 배를 구입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달이 지고 썰물이 시작되는 시간을 기다려 조선 땅을 달아났다. 이틀후인 9월 6일 하멜 일행 8명은 일본 하라도섬(平戸島)에 도착했다. 이들은 14일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 하멜이 탈출한 여수에 세워진 하멜박물관 /위키피디아
▲ 하멜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큄에 세워진 그의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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