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어둠 속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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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어둠 속의 연주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12.26 11: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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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에 성원의 박수를…

 

[조병수 프리랜서] 음악이 흐르자 조명등이 하나 둘 꺼져간다. 깜깜한 무대 위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청중들은 숨을 죽인다. 아니, 숨쉬는 소리조차 미안하다.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 창단 1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다.

두 시간 가까운 공연이 끝나갈 즈음이다. 다른 음악회처럼 지휘자가 들락거리는 커튼 콜도 없이, 모든 단원들이 그대로 앉은 채로 앙코르 곡들을 연주한다. 그 중의 한 곡이 시작되자, 이처럼 음악당의 모든 불빛이 사라진다. 눈을 뜬 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이 어둠 속에서 연주를 하고, 그 음악을 듣는다.

덩달아 눈을 감아본다. 연주자들이 한 마음으로 만들어내는 음률을 따라가다 보니, 그 순간 순간이 감동의 도가니다.

 

20여명의 단원들이 악기를 들고 입장할 때에, 시각장애 연주자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이끌려서 등단한다. 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음악감독이자 클라리넷 연주자도 다른 단원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는다. 언뜻 보기에도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이 절반 정도는 됨직하다. 그들 앞에는 악보가 없다.

리더인 음악감독이 의자 옆 바닥에 놓인 마이크를 들고 일어서서, 연주할 곡의 내용과 연주자들을 소개한다. 악장 중간에 박수를 치지 말아야 할 부분도 알려주며 중간중간 농담도 던지지만, 객석의 관중들이 더 긴장하는 듯하다.

잠깐 동안 각자 악기의 음을 고르더니, 음악감독의 크게 들이쉬는 숨소리에 따라 연주가 시작된다. 지휘봉도 없고, 악보도 없는 분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을 들려주고, “연주하기 어렵다”는 프로코피예프(Sergi Prokofiev)의 『고전교향곡』이라는 곡도 들려준다.

들숨이나 “하나, 둘, 셋”이라는 나지막한 구령으로 연주를 이끌면서 클라리넷 연주에도 바쁜 음악감독은 연신 이마에 내밴 땀을 씻어낸다. 앞자리의 첼로연주자는 연주 중에 끊어진 활털을 손으로 잘라내며 자연스레 연주를 이어간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인데, 어지간한 훈련으로는 어림도 없을 모습들이다.

뒤쪽의 타악기 주자들이 손으로 더듬으며 채를 바꾸거나, 중간중간 청중들에게 소개되는 연주자들이 일어났다가 앉을 때의 편치 않은 모습들에도 시선이 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모든 단원들이 빨간색 머리핀을 하거나 악기에 빨간 리본을 매달고 나왔지만, 도대체 저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연습했으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할 바가 없다. 다만, 보통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만은 분명하다.

 

2부 순서가 시작되면서 무대위로 흰색 개 한 마리가 연주자들과 함께 등장하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훤칠한 키에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를 이끌고 나타난 그 안내견(犬)은 공연시간 내내 피아노 옆에 엎드려서 꿈적도 않는다.

2부에는 경쾌하고도 우리 귀에 익숙한 영화음악들을 연주하는데, 그 피아노 앞에도 악보가 없다. 어떻게 건반의 위치를 잡고 연주를 하는 지 궁금했지만, 그냥 온몸으로 느끼듯 건반을 두드리는 그 우아한 모습에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그들의 공연장에는 여느 연주회장과는 다른 점들이 있다. 입구에는 점자(點字)로 된 안내책자가 비치되어 있고, 객석의 신사분이 그 책자를 손으로 읽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중간 휴식시간에 공연장 옆 화장실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장애인용만은 그대로 비워둔다. 최소한 그 공연장에 온 분들은 그런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이 돋보인다.

 

▲ 하트시작장애인 체임버오케스트라 창단 10주년 기념음악회 /사진=조병수

 

솔직히 나는 음악에 대한 지식도 관심도 거의 없다. 가끔씩 흐르는 클래식 선율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연주회 같은 것은 되도록 멀리한다. 일찌감치 저녁 챙기고, 격식 차리며 박수치는 타이밍을 눈치 보는 것이 싫어서이다. 그런 문외한이지만, 이들의 연주회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이 오케스트라의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우연히 가보게 된 둘째 딸이 그 연주자들의 구성과 무대조명을 끄고 연주하는 순간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귀국 후에 그들의 공연소식을 찾아내서 가족을 초대한 것이 계기였다.

그때는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음악감독의 들숨소리나 발장단, 나지막한 구령으로 시작되는 그 연주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눈이 잘 보이는 사람도 힘들 텐데, 악보도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 천상의 소리 같은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그 광경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던져주었다.

그 이후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연주회만은 찾아 다니려고 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에 기울인 그 집념과 노력을 통해서 삶에 대한 나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되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함을 깨닫는 귀한 시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큰 박수소리에 묻힌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이 끝나자 큰 딸이 한마디를 건넨다.

“연주 중에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하는지, 관심이 온통 연주자들의 움직임에만 쏠려서 음악이 제대로 안 들렸다. 그런데 눈을 감았더니, 오히려 그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더라.”

그 “시각장애 음악인으로 구성된 세계 유일의 민간 실내관현악단”의 연주자들은 스스로 더 큰 가치를 추구하며, 그렇게 그들의 장애를 승화(昇華)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모든 연주순서가 끝났다. 연주자들이 일어서서 관중을 향하여 인사를 하는데도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듯한 모습들이 보인다. 무대를 떠날 때도, 시각장애가 없는 다른 연주자가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연주자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온다.

맨 마지막에 피아니스트가 안내견에 이끌려서 퇴장한다. 놓여진 의자 사이를 무사히 지나서 무대를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우레와 같은 박수가 끊어지지 않는다. 600석(席)이라는 그 챔버홀을 가득 채운 청중들의 마음은 똑 같은 듯 하다.

 

어느 누가 불 꺼진 무대 위로 흐르는 이런 연주를 쉽게 상상이나 하겠는가?

어느 누가 안내견이 음악당 무대에 엎드려 있는 장면을 쉬이 볼 수 있겠는가?

악보도 지휘봉도 없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그렇게 한마음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느낌들.

 

그런 역경을 이겨내고 이런 훌륭한 음악을 듣게 해주어서 감동이고,

그들보다 더 갖추고도 노력하지 않는 우둔함을 깨우쳐 주어서 고맙고,

보다 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줌에 감사하는 마음들.

 

그리고, 어려운 길을 함께 헤쳐 나온 그 모든 단원들에 대한 성원과,

그들의 땀과 노력이 더 큰 보람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들···.

 

▲ 시각장애인용 점자 안내책자 /사진=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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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민 2017-12-29 12:15:05
밀알재단 작은 연주홀에서도 그같은 연주를 들은 감동이 있다. 같이간 친구 4명이 가슴먹먹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연주 후에 모여든 가족들의 꽃다발로 환하게 웃던 그들은 정말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 가족이나 재단을 통한 지원은 있지만 전국적인 후언이나 상설 후원단제가 없는것이다. 더 좋은 연주와 더밝은 세상을 비추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