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출항지 오화리산성①…천혜의 수군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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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출항지 오화리산성①…천혜의 수군거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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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오십천, 동·남으로 동해 맞닿아…이승휴가 머문 요전산성이기도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실직군주로 부임해 512년 우산국(울릉도)를 정벌하러 출항하기 앞서 주둔한 곳은 어디일까.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그 곳이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고성산(古城山)에 위치한 오화리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사부 장군은 지증왕 6년(505년) 실직주 군주(軍主)로 부임해 7년간 실직(삼척)에 주둔했다. 그는 삼척에 주둔하면서 경주에서 데리고 온 경군(京軍)과 현지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합쳐 국경의 군사력을 양성한다. 그리고 우산국을 정벌하고 북쪽의 하슬라(강릉)으로 영역을 확대한다.

이 7년간 이사부의 주둔지가 태백산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동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솟아있는 해발 99m의 야트마한 고성산으로 추정된다.

오분동 소재 고성산의 산성은 옛 문헌에 오화리산성으로 등장한다. 한자로는 吾火里 또는 吳火里라고 표기된다. 언어 변천과정을 보면 ‘오화’(吾火)의 ‘화’(火)가 ‘불’(火)로 변해 ‘오불리’→‘오분리’로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지번은 삼척시 오분동 12번지, 산성의 높이는 최고 70m 정도다. 산성 동쪽은 가파른 벼랑이 바다에 면하고, 서쪽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산허리까지 촌락을 이루었고, 북쪽엔 태백산맥의 지류인 두타산 서쪽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해자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다.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도도 높다. 탁트인 동해바다가 면해 있고, 태백산맥이 해안선과 평행으로 병풍처럼 막아서고, 동해안에서 가장 길고 수량이 많은 오십천이 북쪽을 흐른다. 이 성이 동해를 우리 영토로 만든 시초이고, 독도를 우리땅으로 만든 기원이라는 역사성도 관광에 필요한 스토리를 채워준다.

 

▲ 삼척 봉황산에서 바라본 오분동 고성산 /사진=김인영

 

<1> 문헌 고찰

 

오화리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풍부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삼척군읍지, 척주지 등에 오화리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산성은 고려 우왕 10년(1384년)에 삼척 남쪽 9리에 축성되었다. 조선 세조 8년(1462년) 관찰사 허종이 증축했다.

② 왜구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축성되었다.

③ 둘레는 1,870척이다. (1척은 약 30cm로, 성의 총길이는 560m 정도 된다.)

④ 성내에는 샘이 하나 있다. (문헌에 나타나는 샘은 지금도 산 중턱에 있다.)

⑤ 토성(흙성)으로 만들어졌다.

⑥ 성의 책임자는 만호(萬戶)의 벼슬이 맡았다.

⑦ 처음부터 수군의 거점으로 등장했다. 오화리 산성은 조선중기까지 영동지방의 동해 수군을 총괄하는 산성이었다. 월성포, 울진포, 대포, 고성포를 관할했다. 하지만 조선 중종 15년(1520년) 조정은 오화리산성의 임무를 정라진 육향산 밑으로 이동케 해 동해안 방어의 핵심역할을 맡겼다.

⑧ 성에는 계승루, 진동루가 있다. 산정에는 망대(지휘대)가 있다. 누각에 올라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바라보았다.

⑨ 대부분 붕괴되었다.

⑩ 중턱은 밭으로 개간되었고, 그 아래 마을이 오화진이다.

 

옛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오화리산성은 동해안 수군거점 산성이었다. 고려말에 축조되었다고 하는데, 성 주변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신라시대부터 활용되었던 군사요충지였다.

 

<2> 지형적 여건

 

삼척은 육지로는 태백산맥이 가로 막고 있지만, 해상으로 왜, 여진, 몽골의 해상 침공에 열려 있는 지형이다. 역으로 삼척을 수군기지로 활용하면 동해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는 이점이 있다.

오화리산성 주변에는 해안 절벽이 반복해 나타나고, 해안에는 많은 암초가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동해안에서도 가장 험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오십천 하구와 정라진 사이에 열려 있는 공간이 고대로부터 해상활동의 거점이 될 충분조건이 된다. 오분동과 정하동 사이의 거리가 800m나 되는,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포구를 형성하고 있다. 이사부 장군이 이 포구에서 울릉도를 정복하기 위한 군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화리산성 북쪽을 흐르는 오십천은 영동지방에서 수량이 많고 길이가 가장 긴 하천이며, 이 하천 하류 지역은 삼척시내는 인구밀집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산성 동쪽은 절벽이고, 그 밑에 바로 시퍼런 동해 바다의 파도가 치고 있다. 남쪽으로는 영동 남부와 경상도 해안지역을 연결하는 7번국도가 한재(漢峙)를 넘어 연결되어 있다.

종합하면 오화리산성은 동쪽은 바다, 북쪽은 오십천, 남쪽은 협곡이 형성된 천혜의 요새다. 아울러 영동 지방의 중건 허리에 위치해 북쪽으론 강릉, 속초, 영변(북한), 남쪽으로는 경상도 동해안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오화리산성 주변에 옛 기와와 신라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은 신라시대 이래 전략적 중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 오화리산성의 위치 /네이버 지도

 

<3> 요전산성=오화리산성

 

고려시대 문신 이승휴(李承休)는 1253년 삼척에 거주하면서 망무릉도행(望武陵島行)이라는 시를 지었다.

 

越癸丑秋 因避胡寇 一方會守 眞珠府 寥田山城

城之東南面 熐浡際天 而四无涯 極中有一山

浮沈出沒 於雲濤 煙浪之間 震昏媚嫵 若有爲之者

父老云 武陵島也 江陵田使君命子賦之 聊以鄙語形容云

 

(계축년(1253) 가을 몽골의 난리(胡寇)를 피해 진주부(삼척)의 요전산성에 모여 수비하였다. 성 동남면은 바다에 면해 있고, 그 바다는 하늘에 닿아 사방이 끝이 없었다. 그 속에 산이 하나 있어 물결 안개 파도 속에 떴다 가라앉았다, 나타났다 잠겼다 하였다. 이침저녁에 더욱 아름다웠는데 마치 무슨일을 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이 “무릉도입니다”고 하였다. 강릉 전 사또가 나에게 시를 지으라 하기에 서툰 말로 형용한다.)

 

이승휴가 언급한 요전산성(寥田山城)은 어디인가.

1963년 최만희(崔晩熙)라는 분이 진주지(眞珠誌)에 올린 글에서 “오화리산성이 요전산성이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이승휴가 시에서 요전산성의 위치를 “성의 동남쪽이 바다에 면해 있고, 바다는 하늘을 닿아 사방이 끝이 없는 곳”이라고 적시했는데, 그곳이 바로 오화리산성의 위치와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 노인들이 울릉도(무릉도)를 바라보면 보인다고 했는데, 지금도 오분리 사람들은 맑은날 울릉도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최만희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오화리산성이 고려때 요전산성으로도 불리웠다는 얘기다. 즉 오화리산성은 신라 이사부 장군이 513년 우산국 정벌 당시 전선의 출발지였다는 가설에 신뢰를 더해준다. 게다가 오분진이라는 포구가 주요 수군기지였다는 가설도 입증하게 된다.

오화리산성 남쪽에는 사직역(史直驛)이었다. 기차역이 아니라 조선시대 말(馬)로 역참을 운용할대 역(驛)이었다는 의미다. 오화리산성은 육상의 거점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승휴의 시를 근거로 하자면 오래전부터 요전산성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맑은 날 울릉도를 보았다. 그렇다면 그에 앞서 우산국 정벌에 나선 이사부도 울릉도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고 출항했다는 얘기가 된다.

 

▲ 삼척 오분동 오화리산성 아래 바닷가에 세워진 우산국복속 기념비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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