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②…大三極 合六 生七八九 運三極 四成 環五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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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②…大三極 合六 生七八九 運三極 四成 環五十
  • 주우(宙宇)
  • 승인 2017.12.1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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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三極(대삼극)하여 合六(합륙)한 탓에 七八九(칠팔구)가 生(생)기는 걸 깨달을 때, 運三極(운삼극)하여 四成(사성)한 덕에 五十(오십)이라는 고리(環 환)가 형성된다.

 

자신을 자각하도록 도우려고 펼쳐진 외부현상을 오히려 탐진치로 대한다면 악화하여 완고해지고 결국 돌이키기 어려운 심각한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를 깨달아 그런 외부현상을 자신의 거울로 삼고서 자기를 완성해가면 결국 양면성을 다루고, 남을 잘되게 하는 홍익하는 존재가 됩니다.

 

전3극(前三極, 天1極·地2極·人3極)이 탐진치의 대상으로 중대시(大) 된다면 더해져서(合) 완고한 6(六)이 되고 결국 환원이 어려운 현실인 후3극(後三極, 天7極·地8極·人9極)인 7·8·9(七八九)가 발생하고(生) 만다.

하지만 이를 깨달아 3극(三極, 天1極·地2極·人3極)을 운용하여(運) 4(四)라는 사람을 완성해간(成) 덕택에 균형 잡힌 중심인 5(五)와 홍익하는 존재인 10(十)이라는 고리(環)가 형성된다.

 

이 2문단은 천부경 중 유일하게 수리(數理)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풀 때 기존의 수리에 맞추면 풀리지 않을뿐더러 더 혼란과 미궁에 빠지기 쉽습니다. 검토해보면 기존의 수리는 대다수 실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일부 사람들이 편의로 내놓은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천부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리에 천부경을 맞추지 말고 오히려 현실에서 수행할 때 실제 체험한 내용에 천부경을 적용해보는 발상의 전환이 훨씬 더 도움됩니다.

그리고 본문의 ‘三’은 ‘三極’의 준말이므로 大三은 大三極, 運三은 運三極이 됩니다. 대구(對句)인 이 ‘大三極’과 ‘運三極’에서 大는 ‘확대하다’ ‘중대시(重大視)하다’는 의미며, 運은 ‘운용하다’ ‘활용하다’는 의미의 동사(動詞)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三極이 ‘一’, 즉 자신의 존재됨됨이에 따라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맞닥뜨리게 된 그 三極의 현상을 중대시해서 확대하는 태도가 大三極이고, 활용해서 운용해가는 태도가 運三極인 셈입니다.

그런데 중대시하고 확대한다는 大의 의미에 바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대구가 되는 運을 먼저 이해하는 방식이 도움됩니다. 다양한 의미가 있는 運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세간이나 출세간 문장끼리는 서로 뜻이 통한다고 했으므로) 출세간⊕ 문장인 3문단 둘째 구절인 用變(용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運三極 四成’과 ‘用變’은 유사한 의미입니다. 變이 자신의 태도적 변화를 뜻하므로 運도 변화와 관련돼야 합니다. 그리고 ‘用’은 활용한다는 의미이므로 ‘運用’이라는 단어를 조합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運三極은 三極을 ‘자신의 변화’에 활용하고 운용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運三의 대구(對句)인 大三은 틀림없이 반대 의미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大’자는 다양한 뜻이 있으나 (‘자신의 변화’와는 반대로) 결국 ‘외부(타자)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외부현상을 중대시해서 확대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天1極·地2極·人3極의 외부현상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타자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상황을 확대재생산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大三極은 외부현상을 탐진치(貪瞋痴)의 대상으로 중대시하여 七八九로 점점 악화하는 상황을 불러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大三極은 붓다께서 언급한 그릇된 길인 ‘오로(micchāpaṭipadā誤路)’이며, 運三極은 올바른 길인 ‘정로(sammāpaṭipadā正路)’인 셈입니다. ‘三極’, 즉 제시된 현상에 대해 바르게(yoniso) 마음을 일으키고 정하면(manasikara) 고(苦)가 환멸(nirodha還滅)하는 정로(正路)며, 그르게(ayoniso) 마음을 일으키고 정하면 고(苦)가 집기(samudaya集起)하는 오로(誤路)라는 것입니다.

大三極의 그른길을 팔오도(aṭṭhaṅgika-micchā-magga八誤道)라고 하며, 運三極의 바른길을 팔성도(ariyo-aṭṭhaṅgiko-magga八聖道)라고 합니다.

그래서 大三極의 오로(誤路)는 ‘무명(無明)을 연(緣)한 위(爲)가, 위를 연한 식(識)이,~~생(生)을 연한 노사(老死) 슬픔·비탄·고통·원망·절망이 형성되어 이 모든 고온이 집기하는 그릇된 길이며, 運三極의 정로(正路)는 ‘무명(無明)이 완전히 벗겨지고 환멸해야 위(爲)도 환멸하고, 위가 환멸해야 식(識)도 환멸하며,~~생(生)이 환멸해야 노사(老死) 슬픔·비탄·고통·원망·절망도 환멸되어 이 모든 고온(苦蘊)이 환멸하는 올바른 길입니다.

 

☸ 이분법(二分法) 중용(中庸)

양쪽에 치우친 견해로 가지 않는 적중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이것이며 또한 저것이다’며 양쪽을 긍정하는 중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용을 이해하려면 이분법을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분법에는 우리 편(특히 자신이 속하거나 관련 있는 쪽)은 선하고 반대편은 악하다는 흑백의 적대적 이분법부터, 자신과는 다른 대상이 공존할 수 있음을 찾아내는 긍정적 이분법까지 있습니다. 붓다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을 식(識 viññāṇa)과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고 했습니다.

밤-낮, 주宙-우宇, 보편성-특수성, 영원성-불멸성, 사대事大-사소事小, 사랑-자랑, 수탈-모심, 약탈-봉사, 존엄-비굴, 본本-말末, 원죄-고통, 이권-인권, 기억-기대, 검색-사색, 정치-통치, 생활-생존, 도피-도전, 노동-놀이, 소통-호통, 희망-절망 등 무수합니다.

 

이분법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일단 대상이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모든 사건 ‧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계는 상대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므로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 자신과는 다른 관점이 있고, 정반대 견해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고, 상대적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견해가 틀리며, 혹 전제가 엉터리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런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음을 의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고로 그렇게 의심하는 나는 존재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진실을 알고 보면 ‘오직 모를 뿐!’입니다.

그다음 나타난 대상이나 현상에 대척되는 것을 찾아내거나 그것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을 찾아내고 상반된 관점도 찾아냅니다. 이를테면 태풍을 접해서 살림살이에 피해를 준다는 관점과 공기와 바다를 정화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물 반 컵을 ‘반이나 비었다’고도 ‘반이나 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부족해도 불편하고 넘쳐나도 불편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이든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이든 원래의 취지는 누구나 후천적으로 교육을 통해 선을 함양하자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날 기르던 말이 한 마리 없어졌다 해도 해롭다 하지 않으며, 없어진 그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왔다 해도 이롭다고 하지 않으며, 그 말을 탄 자녀가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나쁘다 하지 않으니, 마침내 전쟁이 나도 자녀는 병역면제를 받았다 합니다. 상황이 유리하다고 자만하지 않고, 불리하다고 좌절하지 말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으므로 불우지비(不虞之備) 해야 합니다. (이런 상대적 관점을 지닌 상태가 되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다음 양쪽이 추구하는 목적과 취지에서 겉으로 드러난 차이와 숨어 있을 공통점을 파악한 다음 자신에게 유익한 부분만을 적용해보는 것이 중용입니다. 중용(中庸)이란 이를테면 비겁(卑怯)해야 할 때는 비겁하고, 만용(蠻勇)을 부려야 할 때는 만용을 부려야 용기의 존재가 되듯이, 각각의 상황에 맞아떨어지게 처신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기도 하며 또한 저것인 중용은 어정쩡하게 중립적 입지를 취하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의식해서 어려운 쪽을 진심으로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쪽으로 간다고 실제로 결단하면 상반된 두 가지 선택에서 얻으려고 했던 결과들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성하고 공시(共時)적인 기적체험을 맛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천천히 서둘러 와라’, ‘대충 철저히 해라’ 이런 표현입니다. 과거 필자가 군 복무할 때 내무 점검이 있어서 청소할 때 선임이 “청소를 대충 철저히 하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말이 안 되는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는 줄로 알았지만, 차츰 생활하면서 오히려 그 표현이 나름의 일리가 있음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청소를 잘못해서 지적받으면 선임 자신도 괴롭고, 시간 안에 청소를 못 마치면 자신도 협력해야 하기에, ‘청소를 대충해서 지적받지 말라’와 ‘너무 철저히 한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두 가지 의도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고도의 수사(修辭)였습니다. 나중에야 내무반 점검하는 사람마다 특성이 어떤지를 빨리 파악해 적절히 대응하라는 뜻도 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지적받지 않게 너희가 알아서 책임지고 청소해라’였습니다.

- '붓다의 발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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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민 2017-12-19 20:33:18
유익에 촛점을 맞추니 참 편하네요. 홍익이 거기 있고 중용이 거기 있네요. 적극 한쪽을 택하여 반하려는 용기를 가지며 외려 상대쪽을 인식하게 되는 고도의 수사는 멋집니다. 신에게도 대척할 용기를 가질 수도 있다니 좀 놀랍기도 하지만 모두 나 중심이로군요. 신 중심의 사고는 할필요도 없을지 모르지만 신앙은 필요해요. 인본을 대척하면 신본이라 모른 것을 갈지라도 거기 유익 중용 홍익은 잇고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