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시진핑, 언급한 진린 도독과 그 후손은?
상태바
문 대통령-시진핑, 언급한 진린 도독과 그 후손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16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문 대통령, 2014년 방한시 시진핑 언급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베이징 대학 연설에서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며 임진왜란때 참전한 진린 장군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의 완도군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2천여 명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진린 도독은 앞서 지난 2014년 7월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에서 한 연설에서도 언급됐다. 시진핑은 당시 초청 특강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 정유재란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 진린 도독과 등자룡을 언급하고, 진린 도독의 후손들은 오늘까지 한국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3년여의 세월을 두고 시진핑 주석과 문 대통령이 진린을 언급하는 것은 두 나라가 역사과정에서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손들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물을 찾았던 것이다. 게다가 왜구를 상대로 함께 싸웠던 인물을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일본을 경계함에 공동전선을 찾자는 것이다.

어쨌든 두 정상이 시차를 두고 진린을 언급했다. 그 정치적, 외교적 함의를 차치하고, 진린과 한국에 사는 그의 후손에 관해 알아보자.

 

▲ 1599년 임진왜란 종결후 귀국직후의 모습으로, 최근 광동성에서 공개되었다고한다. 말아래 무릅끓어 항복한 사람은 당시 반락왕국의 '우' 왕임 /출처: 광동 진씨 대종회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 도독은 중국 광둥(廣東) 지방의 무관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제독이다.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진출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명나라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순천왜교성 전투, 노량해전, 그리고 임진란 마지막 전투인 남해왜성 함락작전을 지휘해 일본 수군을 초토화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광둥성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죽은뒤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에서 배를 타고 조선로 와서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했다. 그후 할아버지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사해 정착해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시조가 되었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는 진린 도독의 후손 6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해남의 황조마을 후손들은 2년에 한 번씩 한식날엔 본토 진씨들이 제사에 참석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통영시는 원푸시와 우호도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광동 진씨는 2,397명으로 집계되었다.

 

▲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1598년 진린 도독이 정유재란에 참전해 왜국을 물리친 전쟁 기록화 /출처: 광동 진씨 대종회

 

진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진린은 정유재란시 전함 500척과 수군 등 병력 2만 여명을 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1597년 10월 500여척을 거느리고 충청도 당진에 도착했다. 다음해 선조와 대신들은 전라도에 가는 진린을 전송했으며, 1598년 7월16일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그를 융숭하게 영접했으나 술잔을 집어 던지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했다. 이에 이순신은,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이곳에 와 왜적을 토벌하는 일인데, 우리 진중의 승첩이 장군의 승첩이 아닌가. 우리가 잡은 적의 머리를 장군께 드릴테니 본국의 황제께 승첩을 아뢰십시오” 이말을 들은 명나라 군사들은 ‘과연 훌륭한 장군이다’라고 탄복했다 한다.

진린이 진을 친 곳은 고금도 묘당도이며, 이순신은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덕동에 진을 쳤다.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한 진린은 명나라 황제 신종(만력제)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명나라 장군으로 삼을 것을 청했다. 그는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를 본 신종은 명나라 도독으로 삼는 벼슬과 함께 현재 경남 통영시의 충렬사에 보관돼 있는 보물 440호 팔사품(八賜品)을 하사했다. 팔사품은 진린 도독의 도장,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이다.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됐다. 진린의 태생지인 광동성 소관시 옹원현(翁源縣) 주파진에 있는 문중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옹원현에서 태어나 운부시 윈푸(雲浮)시 윈안(雲安)구 육도진 등에서 생활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