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③…“자기파 임금 세워라” 왕위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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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쟁③…“자기파 임금 세워라” 왕위계승 전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1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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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과 최숙빈 소생 왕자의 후계구도 놓고 사활을 건 정쟁

 

조선 제19대 숙종(재위기간 1674∼1720) 때에 경신(1680), 기사(1689), 갑술(1694)의 세차례 환국(정권교체)을 거치면서 당쟁이 최고조로 달했다. 그중 기사, 갑술 두 환국은 숙종과 희빈 장씨, 숙빈 최씨의 사랑 싸움과 얽히며 전개돼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주제로 많이 다뤄졌다. 사랑, 권력의 암투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그러면 그들이 낳은 사랑의 씨앗, 즉 왕자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숱한 장희빈 드라마는 장옥정이 사약을 마시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실재 역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후의 스토리는 더 가관이다.

연적 관계인 희빈 장씨와 숙원 최씨의 자식들은 숙종 다음 임금인 20대 경종, 21대 영조로 이어진다. 조선의 당쟁은 두 여인이 낳은 왕자들의 정통성 논쟁, 왕위 계승전쟁으로 이어졌다.

 

① 장희빈과 최숙빈의 암투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는 궁중 나인으로 궁궐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으로, 양반 다음 계급인 중인 가문이었다. 숙종은 재위 10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씨가 왕자 균을 낳아 주었다. 임금에 오른지 14년만이다. 숙종이 기쁨에 넘쳐 후궁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후계자로 삼으면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반대상소를 올리다 사약을 마시고, 신분 상승으로 노리던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된다.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특히 부인을 여럿 둘수 있는 조선의 왕은 한 여자에 매이지 않는다. 인현왕후를 폐위시킨지 5, 6년이 지난 후 어느날 숙종은 궁궐을 거닐다 불켜진 방에서 한 궁녀가 폐비 민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축원을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가 나중에 숙빈 최씨다. 이때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이 식을 무렵이었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갖는다. 그가 연잉군(나중에 영조)이다.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은 무수리 출신으로, 희빈 장씨보다 더 낮은 계급이었다. 무수리는 궁중 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여종을 말한다. 천하디 천한 신분의 여자가 왕자를 낳았다.

두 여인의 질투가 빚어 낸 암투는 장희빈의 몰락으로 귀결되었고,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최숙빈이었다.

 

▲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죽어가는데, 세자(경종)이 울부짓는 모습. /KBS 홈페이지

 

② 세자 즉위를 반대하는 노론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賜死)된 후(1701), 아버지 숙종이 세상을 뜰 때(1720)까지 19년간 세자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집권세력인 노론은 세자를 내쫓으려 했다.

장희빈을 죽이는데 협조한 노론의 입장에서 그의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박감에 빠졌다. 노론은 어떻게든 세자의 즉위를 막으려 했다.

숙종에게는 세자 이외에도 두 아들이 더 있었는데,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과 명빈 박씨가 낳은 연령군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았을 때 세자는 13살, 연잉군은 7살, 연령군은 2살이었다. 장희빈과 한패였던 남인과 소론은 세자의 즉위를 희망했고, 노론은 세자 이외의 두 왕자 중 아무나 임금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재위 43년째인 숙종 말기인 1717년 7월, 숙종은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며 밀담을 나눴다. 사관과 입직승지도 물리친 채 나누는 밀담은 조선 정치관례 상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숙종은 노론 영수와 독대한 후 대신들을 불러 “내가 안질로 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소론과 남인이 지지하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일은 집권 노론으로는 반대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일제히 숙종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히려 소론이 반대했다.

당시의 중론은 숙종와 노론이 밀약에 의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놓고 흠을 잡기 위한 술측이라는 것이었다. 세자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아버지는 뒤에서 가만 있다가 실수가 나오면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나중에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그런 일을 했다. 노론은 그 뜻을 헤아려 반대당파의 세자가 임금을 대신해서 정치하도록 묵인했고, 소론이 반대한 것이다.

소론의 반대당론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강행했다. 인사(용인), 병력운용(용병), 형벌 책정(형인)을 제외하고 정무를 세자에게 넘겼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 길었으면 경종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숙종은 세자에게 정무를 맡겨놓고 3년후인 1720년 사망했다. 세자도 아버지와 노론의 눈치를 보아가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변형

 

③ 동생에게 임금자리 내주라는 압박

 

이제 큰 일 난 당파는 노론이었다. 새로 즉위한 임금의 어머니 문제는 연산군, 후에 정조에서 보듯 후유증이 컸다. 장희빈의 사사를 주장한 노론, 세자를 지지하고 보호해온 소론의 입장이 역전된 것이다.

장희빈의 아들이 임금이 되자 장희빈의 원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하지만 경종(1720~1724)은 상소를 올린 유생을 매로 다스려 죽여버렸다. 아직 집권당은 노론이었고, 자신의 세력은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종이 33세에 즉위했으니, 권력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노론은 서둘렀다. 경종이 힘을 갖기 전에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하자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즉위할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물론 임금이 젊고 왕비 선의왕후 이씨가 15세밖에 안돼 후사를 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10대에 불과한 어린 왕비가 종친 가운데서 양자를 구하자고 했으니, 경종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황을 노론이 노렸다. 노론은 양자를 구할 게 아니라 동생 연잉군에 다음 자리를 넘겨주자고 주장한 것이다.

경종이 즉위한지 두달도 안된 시점에 “전하의 춘추가 한창인데도 후사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수습하는 길은 후사를 빨리 정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경종이 힘이 있는 왕이라면 상소를 올린 이정소라는 자를 물고시켰을 터였다. 하지만 상소가 올라온 그날 저녁,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이 임금을 뵙겠다고 청했다. 새벽 2시, 두 정승 이외에 판부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대사간, 판윤 등 서인 거두들이 줄줄이 입시했다.

노론 당상관들은 임금을 압박했다. 후사를 정하자는 것이다. 임금이 아들이 없으나, 동생에게 다음 임금이라고 미리 정하자고 요구했다.

거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왕자가 없으면 빨리 낳으라고 기원을 해야지, 빨리 동생에게 차기정권을 정하자고 한 것이다. 군부와 사정기관의 총책들도 몰려왔으니, 임금이 여기서 거절하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노론의 겁박에 경종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숙빈 최씨가 낳은, 배다른 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다는 것이다.

노론 일파는 임금의 허락을 받은 후 대비(인원왕후 김씨)에게 달려갔다. 임금의 승낙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궐의 최고 어른의 재가를 받아 두어 두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날 밤은 길고 길었다. 대비는 곧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새벽녘에 이르러 대비는 한글(언문)으로 된 교지를 내려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승인했다.

소론이 가만 있지 않았다. 경종은 소론과 남인이, 연잉군(영조)은 노론이 지지하고 있었다. 소론은 “이런 중요한 일을 여러 신하들이 참여하지 못한 채 한밤중에 궁궐 깊숙한 곳에서 결정됐다니 놀랍다. 임금을 농락하고 겁박한 대신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권은 노론의 것이었다. 일단 연잉군의 세제 책봉은 승인되었다.

남은 것은 상국인 청나라의 왕세제 책봉이 문제였다. 청나라엔 노론 거물 이건명이 사절단으로 갔다. 청의 관리가 “조선 임금의 병이 무엇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건명은 “위(痿)입니다“고 대답했다. 위(痿)는 발기부전을 의미한다. 노론은 임금에게 병이 있다고 꾸며서 다음 임금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는 문제의 당위성을 청나라에게 설명한 것이다.

 

④ 경종의 숙청작업

 

노론의 책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세제인 연잉군에 대리청정을 맡겨 정무를 맡기자고 주장했다. 노론의 압박에 경종은 배다른 동생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했고, 소론이 반발하자 다시 대리청정을 환수하는 일을 두 번이나 거듭했다. 이렇게 권력 이양 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싸우는 과정에서 경종은 소론을 선택했다. 경종은 소론과의 연대를 통해 임금을 코너로 몰아넣는 노론을 밀어 내기로 한 것이다. 즉위 이듬해다.

이번엔 소론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노론을 박멸하기로 결심한듯하다. 경종 2년 목호룡이라는 자가 노론이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고변을 들고 나왔다. 고변의 내용은 끔찍했다. 역모를 꾀한 자들은 자객을 보내 경종을 살해하거나 궁녀로 하여금 수랏상에 독을 넣고, 숙종의 유언을 위조해 임금을 폐출하기로 음모했다는 내용이있다.

노론은 죽어나갔다. 고변에 이름이 올라온 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장살(맞아 죽음)되었고,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요구한 네명의 노론 대신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소론은 가혹했다. 사형당한 사람이 20여명, 장살된 사람이 30여명, 주모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형당한 사람이 13명이었고, 114명이 유배 처분을 받았다. 집안의 몰락을 본 부녀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연좌죄로 묶인 인물이 173명이었다. 이를 임인옥사라 한다. 이렇게 노론은 뿌리채 뽑힌 듯 했다.

하지만 경종은 36의 젊은 나이에 즉위 4년 2개월만에 사망했다. 병약했고, 후사가 없었다. 하지만 세간에선 영조와 노론이 손잡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루머가 파다하게 퍼졌다.

노론이 몰락할 시점에 연잉군도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파 싸움은 왕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종은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사랑했고, 아우를 도닥여주며 당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방파제 역할을 했기에 영조는 살아남아 임금이 될수 있었다.

 

⑤ 질긴 인연

 

영조가 임금이 된 후 살아남은 노론이 다시 집권했다. 그들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다 죽은 대신들의 원을 풀자고 덤벼들었다. 소론의 거물들이 실각했다. 노론은 끝내 소론 핵심을 도륙내자고 덤벼들었다.

이때 영조는 그만 멈출 것을 주장했다. 영조는 생각이 달랐다. 영조는“ 정치 보복이 악순환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론을 쫓아내면 되지 죽일 것까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임금이 바뀌었다고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충신이 되는 그런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조 임금의 탕평책이 나온 동기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감금시켜 죽인 일 이면에도 경종과 관련된 얘기가 있다. 사도세자는 경종에 대해 동정적이었고, 노론이 경종 당시 노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을 역적으로 몰려고 하자 사도세자가 저지하려 했다고 한다. 이에 노론은 영조에게 “동궁께서 선왕대의 일에 대해 잘못된 소견을 가지고 있습니다”고 일러 바쳤고,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비운은 정조때 또다시 피의 살육행위로 나타난다.

질긴 인연이다. 숙종의 사랑 놀음의 후유증이 경종, 영조, 정조 때까지 4대에 걸쳐 이어졌으니….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굶어죽어 가는 와중에 사대부들은 가렴주구를 일삼고, 중앙정계에 들어와 당쟁을 일삼았다. 조선은 결국 외세에 망하고 말았다. 당쟁이 조선 멸망의 원인이냐는 주장에 논란은 있지만, 적어도 ‘아니다’고 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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