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항복보다 더 굴욕적인 정축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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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항복보다 더 굴욕적인 정축약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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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도 짓지 못하고, 도망온 포로 돌려보내야…청의 눈치 보며 겨우 지은 북한산성

 

1637년 1월 30일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송파들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취했다. 3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민족은 이 굴욕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분해한다.

그러면서도 이 일에 앞서 무슨 조약이 맺어졌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금이야 새로 모실 황제에게 절을 하고 다시 왕권을 되찾았고, 어차피 명나라에 하던 조공을 청나라로 돌리면 되었지만, 나라는 외침에 무방비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정축약조(丁丑約條) 때문이었다.

정축약조는 삼전도 항복의식 이틀전에 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말한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조선왕과 신하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청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정축약조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명과 절교하고 청의 연호를 받아들일 것

②세자와 또다른 왕자(再一子)와 대신의 아들이나 아우를 인질로 보낼 것

③명나라 정벌에 필요한 군사를 징발하도, 특히 가도 정벌에 군량을 보낼 것

④각종 기념일에 사신을 보내고 모든 외교의례는 명의 구례와 같이 할 것

⑤돌아온 포로는 청으로 보낼 것

⑥내외의 대신은 혼인을 맺을 것

⑦신구(新舊) 성의 축성을 불허한다

⑧일본과 관계는 그대로 하고, 올량합(兀良哈)인과의 관계는 끊을 것

 

①~④항은 삼전도 항복 이후 곧바로 시행되었고, ⑥항은 사문화되었으며, ⑧항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복후에도 오랜 세월 조선에 족쇄를 지운 것은 ⑤항의 돌아온 피로인의 귀환조치와 성을 쌓지 못하게 하는 ⑦항이었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올 경우 되돌려줘야 한다는 조항은 인권의 문제이자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국가 흥망을 좌우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을 짓거나 고치지도 말라는 요구는 공성전을 주로 하던 시대에 나라를 무방비로 방치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굴욕적인 조항이 추후 조선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자.

 

▲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네이버영화

 

① 안추원 사건

 

현종 7년인 1666년 안추원이라는 조선 피로인(被擄人, 포로)이 청을 탈출해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사건으로, 조선이 다시 굴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추원은 1637년 13세에 강화도에서 청군에 소속된 몽골병에게 붙잡혀 청으로 끌려갔다. 이후 한인에게 노예로 팔렸고 1664년(현종 5년) 피로생활 27년만에 탈출에 성공해 조선에 돌아왔다.

조선조정은 안추원의 입국사실을 알고 내지로 보내 의복을 지급하고 그의 정착을 도왔다. 물론 청나라가 모르게 한 일이었다. 이 결정을 내린 사람은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였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했을수도 있고, 당시까지 잔존하던 북벌론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현종에게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풍덕(豊德).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와 친척이 아무도 없었고 생계가 막막해지자, 안추원은 2년후 다시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안추원은 청의 봉성(鳳城)에서 잡혔고, 이 사실이 심양(瀋陽)의 청조에 보고되었다. 이는 정축약조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청 조정은 이번 일을 기화로 조선에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조선에 보냈다. 사신단은 안추원도 데리고 들어왔다. 조사과정에서 청의 사신은 당상관인 정태화와 홍명하는 물론 현종까지 궁지에 몰았다.

청나라는 조선에 5천냥의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일단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정태화와 홍명하에 대한 탄핵 조치가 이어지며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국왕까지 연루되어 수모를 당했다. 사관은 이 사건에 대해 “어찌 남한산성 아래의 굴욕보다 못하겠는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이 50만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들이 도망쳐 와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되돌려보내야 했고, 숨겨주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게 나라냐. 

이 사건 이후 조선 임금과 신료들은 정축약조에 위배되는 일이라면 치를 떨며 기피하게 되었다.

 

▲ 북한산성 중성문 /사진=김인영

 

② 북한산성 수축문제

 

피로인 문제도 20~30년이 지나면서 그 빈도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문제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 축성 금지를 규정한 조항은 여전히 유효했다.

논란은 숙종이 즉위한 1674년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벌어졌다. 이 문제는 30년 이상의 눈치와 조심을 거쳐 숙종 37년(1711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됐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기 한해전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했다. 청은 조선에 조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吳三桂)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뜻을 내걸은 만큼 명(明)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총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총을 지원하는 댓가로 축성 허가를 얻어내자고 했다. 그러면서 한양 외곽에 북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삼번의 난은 조선에도 파장을 미쳤다. 오삼계는 복건성과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의 해상세력과 연계되어 있었고, 정성공은 일본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정성공-일본의 연합 세력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다른 일각에선 조총을 청에 제공하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북한산성 수축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만일 남쪽에서 정성공의 무리가 왜와 연합해 침공하거나 북쪽에서 청이 재침할 경우 왕실과 조정이 도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북지역에 군비를 방치한지 오래였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병자호란 때 입증되었다. 두 성은 그후 제대로 수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왕이 도피할 곳으로 북한산성이 대두되었다. 도성과 가까워 신속하게 피신할 수 있으며, 산세가 험해 방어하기 유리하다는 두 가지 장점이 매력적이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터를 조사한 뒤 성을 쌓으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신료들이 반대했다. 조총 제공을 거부해 청의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정축약조를 위반하며 북한산성을 쌓는 것은 청의 의심을 키워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과 서인이 모두 이 주장에 동참하는 바람에 숙종도 방침을 철회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1675년 조선은 청에 조총 50자루를 상납함으로써 청의 재침 우려를 일단 덜었고, 삼번의 난도 빠른 속도로 진압되자 남쪽에 대한 걱정도 사라졌다.

 

숙종 28년(1702년)에 북한산성 수축 논의가 다시 부상했다.

당시 논의의 배경은 삼번의 난이 아니라 황당선(荒唐船) 문제였다. 황당선은 중국배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조선 해역에 들어와 불법 어로와 약탈을 자행했다. 요즘의 중국어선의 불법어로와 마찬가지였다. 이 황당선은 중국과 일본의 해역의 해적 무리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황당선이 자주 출몰하자 강화도가 해적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고 북한산성 수출이 다시 거론되었다. 이 무렵 대기근으로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고 도적이 들끓었는데 도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도의 불안한 치안상황에서 대신들은 다시금 북한산성의 축성을 제기했다.

이때도 정축약조에 막혀 논의가 중단되었다. 조선 국왕과 신료들은 자발적으로 기었다. 청을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판단해 북한산성 축성 문제는 없던 일로 되돌렸다.

하지만 1710년에 북한산성 축성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다. 요동지방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청나라가 황제 명의(皇旨)로 해적 출몰 사실을 조선에 알려주고 대비하라고 했다. 해적들은 주로 요동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 서북지역은 물론 도성의 안전을 위협했다.

조선 조정은 청 황제의 지시를 축성 허가로 받아들였다. 이에 그토록 반대하던 대신들은 이구동성, 북한산성을 쌓자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산성 쌓기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신료들이 앞장서서 축성을 건의했다. 심지어 반대에 앞장섰던 민진후는 북한산성 수축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곧바로 1711년(숙종 37)에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해 북한산성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성벽 축성은 이때부터 재개되었으니, 정축약조는 정묘호란이 끝난후 80년 동안 조선을 옭아 매었던 것이다.

 

▲ 북한산성(보국문 인근)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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