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엄귀비, 명성왕후 이후 고종을 지킨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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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엄귀비, 명성왕후 이후 고종을 지킨 여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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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주도, 근대교육기관 설립, 영친왕의 생모…구한말 역사의 주인공

 

엄귀비, 순헌황귀비,

조선 26대 국왕 고종의 정비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TV드라마, 뮤지컬, 영화로도 나왔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살해되고 고종황제를 끝까지 지킨 여인은 엄귀비였다. 나중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 추증되었다.

19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살해된 이후 실질적 퍼스트 레이디는 누구였을까. 아관파천의 실질적 주동자. 근대교육기관인 양정을 비롯해 숙명, 진명학교를 세운 분, 그리고 영친왕의 생모이기도 한 엄귀비였다.

 

▲ 순헌황귀비 /위키피디아

 

엄귀비는 평민으로 서소문 근처에 살던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했다고도 한다. 집안이 빈한해 8살에 궁궐에 나인으로 들어갔다. 나인(內人)이란 임금이나 왕비의 시중을 드는 몸종과 같은 여인으로, 거세한 환관 이외에는 남자와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고, 따라서 평생 수절해야 하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어려서 총명했다고는 하나, 신분이 신분인지라 말 없이 높으신 분을 모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종의 승은(承恩)을 받았다.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었던 1885년 어느날 밤의 일이다. 엄 상궁으로선 임금과의 하룻밤 사랑보다는 중전의 불호령이 걱정이었다.

불 같은 성격의 중전 민씨(명성왕후)의 눈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국가가 정상적인 상황이면 왕에게 승은을 받는 것을 장려할 일이요, 궁녀 개인에게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아버지 대원군을 몰아내고 남편 고종의 친정을 주도해온 중전 민씨의 힘이 궁궐뿐 아니라 나라의 정치판에도 영향을 미칠 때였다. 중전은 궁녀, 그 중에서도 자기가 그토록 믿어 몸종 부리듯 했던 엄 상궁의 행동을 그대로 참아줄 리 만무했다.

왕비도 여자였다.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민비는 엄 상궁을 형틀에 매달아 무섭게 고문하려 했다. 죽여도 시원치 않았는데, 마음씨 착한 고종이 민비에게 사정사정해서 엄상궁은 죽음을 모면했다.

민비는 남편의 청을 이기지 못해 엄 상궁을 살려주기는 해지만 상궁직을 박탈하고 서인으로 떨어드리려 했다. 이때 대신 윤용선(尹容善)이 임금에게 아뢰어, 서인은 면했다. 그때 엄 상궁의 나이는 31세.

그후 엄 상궁의 궁궐 밖 10년 세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 참혹한 시련기였을 것이다. 다시 고종의 부름으로 궁궐에 들어오게 된 것은 명성황후의 사후 5일째 되던 날이었다. 정비(正妃)를 잃은 고종이 닷새만에 엄상궁을 찾았으니, 하룻밤 풋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귀비는 못생긴 엄상궁으로 통했다. 지금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미인은 아니다. 뚱뚱한 허리에 볼품없는 외모다. 그런데도 엄 귀비는 고종이 허하고 외로울 때 빈 자리를 채워줄수 있는 여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밑바닥에서 산전수전 다겪은 몸으로, 빠른 판단력과 친화력, 그리고 고종에게 없는 배짱이 있었던 것 같다.

 

명성왕후가 죽고 생긴 빈자리는 엄 귀비가 채웠다.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환궁, 대한제국 선포, 러일전쟁, 을사조약, 정미7조약, 고종의 퇴위, 국망(國亡) 등 우리나라역사의 가장 힘든 시기를 그는 고종과 함께 했다. 힘든 시절에 고종의 뒤에서 위로하고, 마음을 다독거려 주하고, 강하게 내몰기도 하면서 주위의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시절에 고종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고종에게 큰 힘이 되었다.

 

▲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 /한선생 제공

 

1995년 궁궐에 다시 들어간 엄 상궁은 고종을 아관(俄館), 즉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입궁 3개월째인 1896년 2월 엄 상궁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과 공모해 경복궁에서 고종과 왕세자(후에 순종)의 탈출을 실행했다.

엄 귀비는 거사 전 며칠 전부터 가마를 타고 궁궐출입을 자주했다고 한다. 궁궐지기들에게는 나갈 때마다 몇꾸러미의 행하((行下, 일종의 수고비)를 주었다. 무료하게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은 처음에 경계를 하다가 행하의 맛에 빠져들어 엄 상궁의 궁궐 출입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을 두지 않았다.

드디어 1896년 2월11일 새벽 가마 두개가 경복궁 건천문을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엄 상궁이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이 몸을 숨겼다. 뒤 가마에는 다른 궁녀가 가마문 앞에 버티고 앉았고 순종이 바짝 뒤에 숨어있었다. 건춘문을 통과한 두 개의 가마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미국 공사관을 지나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 대신들이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함선에서 그 전날 미리 출동시킨 수군 120명의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상궁의 지모와 배짱이 아관파천을 보기 좋게 성공시킨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는 4개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1개의 방에서 왕과 세자(순종)가 함께 기거하고 1개의 방은 침실로, 1개는 엄상궁의 방이요, 하나는 궁녀들의 방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높디높은 구중궁궐을 떠나 좁은 러시아공사관에서의 생활이 엄 상궁에게는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한다.

가난한 날의 행복이 이런 것일까. 이때 엄 상궁은 영친왕을 갖게 되었다. 1년후인 1897년 2월20일 환궁을 하게 되는데,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가게 된다. 환궁후 엄 상궁은 영친왕을 낳아 귀인으로 봉해지고 이어 귀비로 책봉되었다.

 

▲ 영친왕 /위키피디아

고종은 황귀비 엄씨를 명성왕후의 빈자리인 황후에 책봉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종손인 이준용(고종은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었다)과 유길준, 이재순등 대신들이 반대했다. 이유는 출신 성분이 천해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것. 그 절충안이 황귀비였다. 정비(正妃)는 아니지만, 1903년 고종은 엄 귀비를 황귀비로 봉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고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순종은 병약했고, 아들이 없었다. 가뜩이나 나라가 망국의 기로에 서있기에, 황태자를 세워야 했다. 황귀비 엄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 은(垠)을 황태자로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이은의 배다른 형인 의친왕이 대원군 종손인 이준용과 손잡고 반발했다. 의친왕은 서열로는 자신이 황태자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준용도 역모를 품고 있었다.

 

고종은 9남 4녀를 두었다. 첫째는 귀인 이씨에게서 낳았는데 12살에 죽었고, 둘째는 명성왕후가 낳은 원자로 4일만에 사망했고, 셋째가 명성왕후가 낳은 순종이다. 명성왕후는 그후 두 아들을 두었지만 일찍 사망했다. 고종은 귀인 장씨에게서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강)을 낳았고, 엄 귀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은은 일곱 번째 아들이다. 여덟째, 아홉째 아들도 일찍 죽었다. 순종에겐 의친왕과 영친왕 두 동생만 남게 되어 후계싸움을 벌인 것이다.

딸(공주)은 넷을 두었는데, 첫째에서 셋째까지 모두 일찍 죽었고, 퇴위한 후 귀인 양씨와 낳은 덕혜옹주가 넷째였다. 고종은 덕혜를 애지중지한 까닭이 있다.

 

고종의 선택은 황귀비가 낳은 이은이었다. 이은을 결정하는데 당시의 실력자 이완용의 힘이 있었다고 한다. 황태자 이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영친왕(英親王)이다.

황귀비 엄씨는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지만, 1907년 1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이 사부라는 이름 하에 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몹시 화가 났다. 방학이 되어도 아들을 귀국시키지 않자 황귀비는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에게 “학교에 방학도 없느냐, 홋카이도에 여행을 갔다는데 그럴 시간에 부모를 만나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고 항의했다. 아들 영친왕은 어머니가 죽자 귀국했다.

양정의숙(현재의 양정고), 진명여학교(진명여고), 명신여학교(숙명여대)를 세웠다.

황귀비 엄씨는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7월 20일 57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승하한 곳은 덕수궁 즉조당이다. 사후에 '순헌(純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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