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②…관포지교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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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②…관포지교의 유래
  • 손봉균
  • 승인 2017.10.2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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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 포숙아의 천거로 재상에 올라 죽이려던 제 환공을 패자로 만들어

 

​<이번 글에서는 관중과 포숙아의 지극한 우정을 말하는 관포지교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관포지교는 두사람이 친함으로서 춘추시대의 제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제나라가 춘추시대 첫번째 오패가 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 진 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겠다>

 

(1) 관포지교의 유래

 

중국 춘추시대, 기원전 690년경.

관중과 포숙아는 제나라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친구였으며, 함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였다.

같이 장사를 하면서 관중은 포숙아보다 배 이상의 돈을 가지고 가고, 전쟁에 나갔을 때는 싸움터에서는 항상 후대에 서고 싸움이 끝나고 돌아 갈 때는 항상 맨 앞에 서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장사를 하면서 관중이 왜 배나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느냐?'고 불평을 하고, '관중은 겁쟁이거나 비겁한 자'라고 비난하면, 포숙아는 항상 관중을 두둔했다.

다른 사람들이 돈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포숙아는 “관중은 구구한 돈을 탐해서 나보다 배나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고 식구가 많다. 내가 그에게 돈을 더 가지고 가도록 사양한 것이다. 그대들은 오해하지 마라”고 변명했다. 관중을 비겁한 자라고 비판하면, 포숙아는 “관중은 용기가 없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 자기 몸을 아껴 길이길이 늙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찌 관중이 싸움을 겁내리오”하면서 두둔했다.

아울러 포숙아는 “사람은 누구나 때를 잘 만날 수도 있고 불우할 때도 있다. 만일 관중이 때를 만나 일을 하면 백번에 한 번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함부로 관중을 비난하지 마라”고 하였다.

관중은 이런 소문을 들을 때 마다 길이 찬탄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아다”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함께하자는 교우의 의(義)를 맺었다. 이를 후세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한다.

 

※ 후에 포숙아가 제환공에게 관중을 추천하여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관중은 40년간 제 환공을 주군으로 모시면서 제환공이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제 재상으로 등용되는 과정 등을 설명하겠다.

 

▲ ;관포지교' 그림 /바이두 백과

 

 

​(2) 제환공이 군위에 오르는 과정

 

당시 군주였던 제 양공이 장자인 규와 차자인 소백에게 스승을 두어 지도하게 하였다.

이때 관중이 다음과 같이 포숙아와 의논하였다.

‘지금 주공에게 두 아들이 있소. 다음 날 임금 자리엔 두 아들 중 한명, 즉 규나 소백이 오르게 될 것이요. 그래서 그대와 나는 서로 한명씩 맡아 가지고 그 들의 스승이 됩시다. 그들 중 한명이 군위에 오르거든 우리는 서로 천거하기로 합시다. 그래야만 우리는 언제든지 같은 임금 밑에서 함께 일할 수 있소.’

그래서 관중은 장자인 공자 규의 스승이 되고, 포숙아는 둘째인 공자 소백의 스승이 되었다.

제 양공이 결혼한 여동생과 불륜관계를 갖고, 이를 눈치 챈 여동생의 남편인 노 환공(노나라의 군주)을 죽이는 등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하자, 관중과 포숙아는 장차 재앙이 일어 날 것을 예견하였다. 재앙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당분간 다른 나라에 가서 살기로 하였다.

공자 규는 관중과 함께 외가인 노나라로 가고, 공자 소백은 포숙아와 함께 역시 외가인 거나라로 갔다. 지리적으로는 거나라가 노나라보다 제나라에 더 가까웠다.

두 사람이 우려한 대로 제 양공이 부하 장수인 연칭과 관지부의 반란으로 죽고, 공손 무지가 군위에 올랐다가 다른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공손 무지를 살해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대신인 고혜와 옹름은 장자인 공자 규를 군위에 모시기 위하여 사람을 노나라에 보냈다.

관중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공자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여, 빨리 제나라에 들어 가기 위하여 적은 병력만 거느리고 출발했다. 소백은 포숙아와 상의하고, 제나라에 공자 규보다 먼저 가서 군위에 올라야 한다고 하면서 즉시 거나라를 출발하였다.

관중이 제나라로 가는 중간에 즉묵 땅에서 물어보니 소백이 먼저 통과했다고 하여, 관중은 같이 가는 병력을 뒤따라 오라고 하고는, 혼자서 말을 타고 가서 소백을 따라 잡았다.

관중이 소백에게 요청한다. “공자 규가 장자이고 지금 오고 있습니다. 장자가 먼저 가서 상사(장례)의 주인이 되어야 하니 그 뒤에 오십시오” 라고 하였다.

포숙아가 강경한 태도로 반대하였다. “관중은 물러가라. 우리는 각기 주인이 다르다. 굳이 여러 말 할 필요 없다”

 

※ (주)중국 고대(춘추전국시대 등)에는 부모의 상사에 주인이 되면, 그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버지 제양공의 상사를 주재하게 되면 제나라 군주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사의 주인을 양보하라는 관중의 말은 군위를 양보하라는 뜻이다.

 

관중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소백을 호위하는 거나라 군사들이 노한 눈으로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거나라 군사들은 아차직하면 즉시 싸울 기색이었다. 관중은 자기가 거느리고 온 노나라 병사가 숫자가 적어(병차 30승) 소백이 거느리고 온 거나라 병사(병차 100승)와 도저히 겨룰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관중은 “그러시다면 하는 수 없지요. 나는 물러가겠소.”하면서 돌아 나오는 척하다가 획! 돌아서서, 번개같이 활을 잡아 당겨 수레위에 앉아 있는 소백을 향해 쐈다. 수레위에 앉아 있던 소백은 ‘아앗’하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지르고, 피를 흘리며 수레위에 쓰러졌다. 일제히 곡성이 진동했다.

관중은 소백이 죽은 것을 알고, 노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거나라 군사의 추격이 없자 관중은 비로소 말을 멈추었다. 관중이 말하기를 “공자 규는 복이 많구나. 그가 임금이 될 팔자이기에 내가 쏜 한 대의 화살에 소백이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공자 규에게 바치면서 축하했다. 그리고는 공자 규와 관중은 안심하고 유유히 제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요.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혁대 갈고리에 맞았던 것이다. (이를 사자성어로 관중사구(管仲射鉤)라고 한다)

소백은 전부터 관중이 활을 잘 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관중이 다시 활을 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즉시 입술을 깨물고 피를 흘리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은 듯이 쓰러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백은 관중과 노나라 군사뿐만 아니라 거느리고 온 거나라 군사와 포숙아까지 속였던 것이다.

관중과 노나라 군사가 간 후, 소백은 변복하고 온차(눕게 되어 있는 수레)에 송장 실리듯 드러누워 소로로 달렸다. 소백 일행이 먼저 제나라에 도착하였다. 포숙아가 성에 들어가서 두루 모든 대신들을 찾아보고 소백의 어질고 덕이 있음을 강조했다. 모든 대부는 소백을 영접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소백이 제나라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가 되는 제 환공인 것이다.

 

※ 염옹이 관중이 소백을 쏜 것을 시로 읊은 것이 있다.

 

노나라 군사는 기뻐하고 거나라 군사는 근심했지만

혁대 갈구리를 맞춘 것이 문제가 아니로다

소백이 그 순간 방편으로 죽은 체 한 것을 보면

이미 그는 모든 제후를 통합할 만한 지혜가 있었도다.

 

 

(3) 관중이 재상으로 등용되는 과정(포숙아의 추천)

 

소백이 제나라의 군주로 즉위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는 노나라와 제나라는 전쟁을 하였다. 제나라가 크게 승리하였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포숙아가 대군을 이끌고 노나라 경계에서 시위하면서, 노 장공에게 편지를 보내 공자 규를 죽이고 그 시체와 함께 관중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포숙아가 편지를 가져가는 습붕에게 부탁한다.

“관중은 '천하에 남이 따를 수 없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훌륭한 인물(천하기재, 天下奇才)'이다. 내 장차 임금께 관중을 천거할 작정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노 장공이 관중을 죽이지 않게 하여라. 만약 노 장공이 관중을 죽이려고 하거든, 관중이 제 환공의 혁대를 쏘아서 제 환공이 죽을 뻔 하였다는 사실을 자꾸 강조하라”(제 환공이 관중을 직접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라는 뜻이다)

노 장공이 편지를 받고 이 일을 신하 시백과 상의하니, 시백이 의견을 말하기를,

“우리가 제나라를 이길 수 없으니 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공자 규를 죽이고 제나라에 보내십시오. 다만 관중은 관상을 보니 천하에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울러 제나라에서 그를 돕는 자가 있는 듯하니 제나라로 보내줘도 죽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주공은 제나라에 청해서 관중을 살리도록 하십시오. 주공의 힘으로 관중을 살리고 우리나라에 등용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나라가 관중을 크게 쓸 것이고, 관중이 제나라 정사를 보면 반드시 제나라는 천하패권을 잡게 됩니다. 그러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리 노나라는 제나라의 심부름이나 하게 됩니다”

이어서 “주공께서 관중을 살려 등용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친히 그를 죽여 버립시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제나라로 보냅시오.”라고 건의했다.

노 장공이 시백의 건의를 심각하게 듣지 않고, 제나라의 요청대로 관중을 죄수가 타는 함차에 넣어 제나라로 보냈다.

관중이 살아서 돌아오자 포숙아가 제 환공에게 관중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제 환공은 관중이 자신한테 활을 쏘아 죽을 뻔 했던 일에 대한 감정 때문에 등용하지 않을려고 하였다.

오히려 제 환공은 포숙아에게 나라 정사를 도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포숙아는 사양한다.

“신은 매사에 삼가고 조심하는 것 뿐 입니다. 이는 신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일이고, 국가를 다스릴 만한 인재로서 부족함이 많습니다“

포숙아가 계속해서 관중을 추천하면서 제 환공을 설득하였다.

“이 번 흉사를 조상하고 길사를 축하드립니다. 흉사는 형님이신 공자 규가 돌아가신 것이며, 길사는 주공께서 이제야 어진 재상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그 누가 자기 주공을 위하여 일하지 않겠습니까? 관중이 주공(소백)을 쏜 것은 공자 규만 알고 주공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관중은 천하의 기이한 인재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그를 등용하시면 그는 주공을 위하여 활로 천하를 쏠 것입니다. 주공은 그까짓 혁대 갈고리 쏜 것만을 논하려 하십니까?”

포숙아가 다시 관중을 추천한다.

“대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안으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론 사이(四夷)를 무마하고, 공훈을 주 왕실에 세우고, 모든 나라 제후에게 덕을 펴고, 국가를 태산처럼 튼튼하게 하고, 주공께서 한량없는 복을 누리도록 하고 공을 금석에 드리우고, 이름을 천추에 드날리는 자야라만 비로소 천자의 신하라 하겠으며 왕을 돕는 소임자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인재를 찾으신다면 그가 바로 관중입니다.“

 

※(주) 중국은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를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사이(四夷)란 동서남북에 위치한 오랑캐라는 뜻이다.

 

포숙아가 다시 말하였다.

“신이 관중보다 못 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너그럽고 부드러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둘째, 국가를 다스리되 그 근본을 잃지 않는 것, 셋째, 충성과 믿음으로써 백성과 단결할 수 있는 것, 넷째, 예의를 제정하여 사방에 펴는 것, 다섯째, 군문에 서서 군사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는 것, 이 다섯 가지 모두가 국가를 통합하고 부강하게 하는 데 중요한 것인데 신이 관중만 못합니다.”

그래서 제환공은 마음을 바꾸어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제환공은 관중(본명은 관이오, 관중은 자임)을 오로지 신임하고 존경하는 뜻에서 그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백성들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고 관중이라 부르게 하였다 (고대 사람은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자를 불렀음)

아울러 제 환공은 국가대사는 모두 관중에게 먼저 보고한 후에,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보고를 받으면 관중의 결재에 따르도록 하여 관중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제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한 후 춘추시대의 5패 중 제일 먼저 패자가 되었다. 이는 관중을 믿고 관중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제환공이 군위에 오른 것이 기원전(BC) 685년이고, 그 해에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관중은 죽을 때까지 40년간(BC 685년〜 BC 645년) 재상으로 있었고, 제환공은 관중보다 2년 뒤에 죽었다(재위 BC 685년〜 BC 643년)

 

사관의 시

 

위대한 군후가 정승을 두었으니

그가 바로 잡혀온 죄수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이로부터 지난날의 감정을 서로 버렸으니

천하가 다 제환공의 패업을 칭송하더라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한 손봉균씨가 공무원 재직시의 업무경험을 바탕으로 통일후 북한의 철도,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효율적으로 건설하는 방안을 시리즈로 제시한다. 이 방안은 북한개발을 앞당기고,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활성화하며, 통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방안이 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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