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의 통신보국⑧…이동통신, 차기정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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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의 통신보국⑧…이동통신, 차기정권으로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19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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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권 반납 불구, 국회의원들은 의혹 제기

 

체신부는 선경의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으로 이동전화사업자 선정을 차기정권으로 이양한다고 발표하고, 1992년 가을 국회에서 혼쭐이 났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정의 특혜 의혹을 집요하게 따지고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에게 선경에 유리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데 답변하시오.”

“체신부가 석유정제업의 자기자본비율을 35.2%에서 27%로 낮춰줬는데 선경의 유공에 유리하도록 특혜를 주기 위한 것 아닌가.”

“선경의 계획서가 체신부의 평가항목 및 심사기준과 너무나도 일치해 쉼표 마침표까지 흡사하다. 이는 당국이 심사기준등을 선경에 사전유출했다는 의혹을 입증하는 게 아닌가.”

송언종 장관, 윤동윤 차관등은 체신부 관리들은 똑같은 답변을 개개 의원들에게 수십번이나 해야 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선정 과정의 공정성을 설명한 끝에 체신부는 마침내 의원들을 점차 이해시켜 나갔다. 그러나 의원들은 체신부 설명에는 수긍하며 “선정과정의 공정성을 인정하지만 임기말기에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이권사업을 넘겨주는 것은 「국민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체신부의 관리들 가운데 국회에 불려 다니느라 몸져 누은 이가 있는가 하면, 체중이 눈에 띠게 줄어든 이도 있었다.

체신부의 한 관계자는 당시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국회에 가서 아무리 설득해도 의원들은 이해하려고들 하질 않았어요. 한 의원을 이해시켜 놓으면, 다른 의원이 같은 질의를 해오고... 이해는 하되 국민정서에 맞지 않느냐는데는 대답할 도리가 없더군요. 정치논리가 이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습니다.”

6공화국말의 이동통신사업은 체신부등 정부부처 뿐아니라 정치권에도 엄청난 파장을 던졌다.

제2이동통신사업자선정과 반납으로 업치락뒤치락하던 92년 8월은 선경의 최종현 회장 뿐아니라 그의 사돈인 노태우 대통령에게도 퇴임 7개월을 앞둔 임기 막바지에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달이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문제로 집권당내부에서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바람에 노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간의 감정싸움으로 비화, 온나라가 벌집 쑤신듯 시끄럽게 되고 야당은 여당의 내분을 불구경하듯 즐기고 있었다. 14대 국회는 개원도 못한 채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여야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초부터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경제에 전념하겠다고 밝히고 국회문제등 정치사안은 김 대표 주도로 야당과 대화로 풀어보라고 촉구하는 입장으로 물러나 있었으나 정국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8월 27일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됐던 선경의 사업추진 포기 선언으로 이동통신파문은 마무리되기는 했으나 며칠후 이번에는 한준수(韓俊洙) 전 연기군수의 관건선거 폭로사건이 터졌다.

추석전후 노대통령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비서실장을 지낸 노재봉(盧在鳳) 의원 등 여러사람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며칠간 고심한 끝에 노 대통령은 자신이 만들었던 민자당을 탈당하기로 결심한다. 청남대에서 추석연휴 구상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은 당적이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당적이탈을 결심할 즈음인 9월 16일 김영삼 총재는 남북 고위회담차 북한을 방문중인 정원식 총리를 포함, 「대담한 개각」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김총재의 회견은 내각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노 대통령을 불쾌하게 했다.

9월 18일 노 대통령은 김 총재와 만나 김 총재가 요구한 중립 선거관리 내각을 구성하고 동시에 자신의 민자당 명예총재직과 당적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당적이탈까지 생각치 못했던 김 총재는 노 대통령에게 민자당 명예총재직은 포기하되 당적만은 계속 갖고 있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노 대통령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10월 5일 노 대통령은 민자당사를 방문, 탈당계를 제출하고 당직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이날 박태준 최고위원이 탈당의사를 밝히는등 이어 민자당내 탈당파동이 일고 대통령 선거의 열기는 달아올라 갔다.

물론 92년말의 정치권의 이합집산은 여러 복합적인 변수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전개됐지만 이동통신파문이 그 계기를 만들어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돌풍과 같은 정치의 계절이 가고 93년 2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동통신사업도 김영삼의 새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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