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두목이 된 중국 상인…왕직(王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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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두목이 된 중국 상인…왕직(王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1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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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일본~동남아 밀무역 장악…명나라 관헌의 속임수에 종말

 

명나라 11대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년~1566년)는 왜구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그 우두머리에 앉아 있는 인물의 국적이 섬나라 왜(일본)가 아니라 중국이었다. 바로 왕직(王直)이란 자였다.

왕직의 출생연대는 분명치 않다. 휘주(徽州, 지금의 안후이성) 출신이다.

어려서 소금장수였다고 한다. 중국에선 전통적으로 염업(鹽業)은 국가가 주도하는 전매산업이이서 관료들의 부패로 사업을 영위하기가 힘들었다. 왕직은 소금장사에서 실패하고 불우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격이 호탕하고 활발해 도적떼들과 사귀기를 좋아했고, 당대의 도적들과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왕직은 일찍이 바다로 눈을 돌렸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海禁)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왜구가 자주 침몰하기 때문에 국경을 내륙에 그어 놓고 해안선을 방어했다. 민간이 바다에 나가 어업을 하거나 교역을 하는 등의 모든 해상활동을 금지했다. 당연히 공무역, 즉 조공무역만 인정되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무지막지했다. 해안의 수상생활자, 섬사람, 어민들을 대거 불러 내륙으로 이동시켰는데 그 숫자가 10여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명 조정은 이들을 군대에 등록시켜 부양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터전을 잃은 상당수를 해적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전국(戰國)시대였다. 막부는 힘을 잃고 각지에 제후가 설쳤다. 치열한 내전 속에 물자는 부족했고, 왜인들은 중국의 우월한 물자를 원했다. 그러는 가운데 제한된 조공무역을 놓고 일본 번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1523년 절강성 영파(寧波)에서는 오우치(大內) 가문과 호소카와(細川) 가문 사이에 서로 먼저 조공 무역을 하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폭력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의 해금정책을 뚫는 방법은 밀무역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심해지면 지하경제가 활성화된다. 리스크가 높지만 대신에 이윤이 높아진다. 중국 관리에게 걸리면 죽을수도 있다. 목숨 값은 결국 가격으로 전가된다. 밀수집단은 무장을 하게 된다. 선원이 곧 군인인 해적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지나해에서 일본이 주로 해적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왜구(倭寇)라고 불렀다.

 

왕직은 왜구가 되었다. 그는 “중국 법령이 엄격해서 자칫하면 금법에 걸린다. 차라리 해외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며 동료 도적떼들과 함께 광동(廣東)으로 가서 큰 배를 건조해 국제무역에 나섰다.

그는 유황이나 생사등 금지된 물품을 싣고 일본과 샴(태국) 등지로 돌아다니며 무역을 했다. 밀무역의 수익은 엄청나다. 금지된 물자를 사고팔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다. 그는 5~6년만에 떼돈을 벌었다.

외국인들은 그를 오봉선주(五峯船主)라고 불렀다. 그는 중국인 도망자들을 불러 해적 장교와 병력으로 삼고 왜구의 우두머리들을 수하로 삼아 거대한 해적집단을 구성했다.

왕직은 일본 규슈 서쪽의 고토(五島) 열도와 마쓰우라(松浦)를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의 나가사키현 소속 고토는 당시 수백척의 배가 드나들며 중국 물자와 은을 교역하는 무역항이었다. 왕직은 그곳에서 휘왕(徽王) 또는 정해왕(淨海王)이라 칭하며 중국~일본~동남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좌지우지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점점 강화되었다. 밀무역도 거칠어져 갔다. 단속하는 자와 단속을 피하려는 자 사이에 무력충돌이 빚어졌다. 작은 분쟁에서 큰 분쟁으로 커져갔다. 왜구는 점차 중국 동해안에 출몰하면서 명나라 관아와 충돌했다.

명나라는 처음에 해안에 무역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시박사(市舶司)를 세곳에 두었다. 하지만 그 관청이 있는 곳에서 왜구들이 난동을 부리자, 시박사라는 제도를 없애 버렸다. 시박사가 있었을 땐 소동은 있어도 무역거래가 그나마 순조롭게 이뤄졌는데, 시박사를 없애면서 왜구의 무역거래는 폭력성을 띠게 되었다.

재앙의 원인은 왜구들이 중국인 상인들에게 외상거래를 하고 현지 상인이 그 물건을 팔아 대금을 갚는 관행이 무너진 것이다. 명나라 조정이 단속에 나서자 무역상들이 외상대금을 받을수 없게 되었다. 중국 관리들이 현지상인들이 수입품을 판매하는 행위 자체를 단속하는 바람에 대금 회수가 어려웠다. 따라서 중간상인들이 왜구들에게 외상대금을 갚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단속으로 인해 생긴 분쟁은 그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소송을 걸수도 없었다. 결국은 폭력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왜상들은 외상대금을 받기 위해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

 

왕직은 여(餘)씨, 요(姚)씨, 사(謝)씨를 중국 현지의 중간상인으로 삼았다. 이들 중간상인은 명 왕조가 시박사를 폐지하면서 일본 물품의 판매가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가격을 후려쳤다. 왕직은 가격이 떨어진데다 외상대금이 회수되지 않아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중간상인들은 외상대금을 갚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밀무역 단속을 근거로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들은 “만일 다시 찾아와 빚 독촉을 하면 관아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빚을 떼먹으려는 자들이 오히려 위협을 하자 왕직은 화가 났다. 결국 중간상인들을 보북하기로 결심했다. 왕직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일본 패거리들을 불러 모아 한밤중에 사씨등의 집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남녀 몇사람을 죽이고 재화들을 약탈했다.

지방관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왜구가 쳐들어 왔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왕직도 해안의 중국인들이 왜구를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해 왜인들을 방매로 삼았다.

왕직의 무리에는 일부 일본인이 있었지만, 중국인이 다수였다고 한다. 중국인 왜구가 자국 중간상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도망간 것이다. 왕직을 비롯해 서해(徐海) 등 중국계 무역상들도 성읍을 돌아다니며 외상값을 떼먹는 중국인들을 약탈했다.

왜구의 재앙이 심각해지면서 명나라 조정은 주환(朱紈)을 절강성 순무로 파견했다. 주환은 연근해 현지상인과 관리들이 중국인 왜구든, 일본인 왜구든 해외 무역상들과 연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주환은 병사를 조직해 왜구 소탕에 나서는 한편 내부적으로 왜구와 결탁해 있는 관리들을 척결해 나갔다. 하지만 현지 관리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그동안 해외 밀무역상들과 거래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이를 단속함과 동시에 고발조치당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주환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조정에서 감독관을 파견해 현지 실사를 해보니, 주환이 왜구와 부패 관리를 척결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무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주환은 억울한 결과로 탄핵을 받게 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왜구의 저항은 명나라 스스로 추악함을 들춰 내었던 것이다.

 

주환 이후에도 몇차례 순무를 파견했지만, 그들의 섬멸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치다가 주환처럼 죽음을 맞아할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데다 현지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왜구와의 유착관계를 끊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디어 명 조정은 호종헌(胡宗憲)이라는 인물을 절강성 순무로 보내면서 정왜총독(征倭總督)이라는 직책을 더해 주었다. 그도 왕직과 마찬가지로 휘주 출신이었다.

호종헌은 일본 고토(五島)에 웅거하고 있는 왕직과 그의 일당을 군사력으로 일망타진하기란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에 우두머리 왕직을 잡으면 일당도 해체될 것으로 믿었다. 그가 동원한 것은 음모와 술수였다.

그 계책은 서위(徐渭)라는 호종헌 막하 인물의 머리에서 나왔다. 절강성 출신인 그는 문장력과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뛰어나고 자유분방하며 창의력이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호종헌은 서위의 계책에 따라 일단 중국계 왜구 패거리인 서해(徐海)의 무리를 포위 공격해 서해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어 왕직의 체포에 나섰다.

호종헌은 일단 왕직의 가족과 부하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일본 고토에 머물고 있던 왕직에게 사신을 보내 “귀순해 공적을 세우고 가족과 함께 안전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니겠느냐”며 회유시켰다. 왕직은 귀순 권유를 의심했다. 부하를 보내 진위를 살피게 했는데, 가족과 부하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호종헌의 보호를 받으며 잘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백전노장 왕직은 여기서 무너졌다. 그는 1556년말 귀국헤 호종헌에게 출두했다. 호종헌이 돌변했다. 왕직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1559년 참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명나라는 왜구 최대 수괴와 그 집단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2000년 그의 고향인 안휘성 황산(黄山)에 왕직의 동상이 세워졌다. 중국 학계에서는 그에 대해 ‘민족 반역자’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지만, 서양세력이 밀려오기 전에 국제무역을 개척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평가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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