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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과 소무’ 떠올리는 몽골의 중국식 복장 미라

기사승인 2017.10.16  14: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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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중원에서 유행하던 패션에 오른쪽으로 옷깃 여미는 우임의 복식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알타이산맥 남쪽 몽골지역에서 중국식 복장을 한 미라를 발견했다는 자료를 읽다가 문득 한 무제 시절의 이릉(李陵)과 소무(蘇武)의 일화가 생각이 났다.

 

중국 한나라 무제(재위 BC141~BC 87년) 때 일이다.

소무는 한나라 무제가 내린 포로 교환의 임무를 맡아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 땅에 들어갔다가 내란에 휘말려 포로가 된다.

흉노왕 선우(單于)는 소무가 결백을 주장하며 굴복을 거부하자 멀리 북해의 물가로 추방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는 명, 즉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명을 내린다. 소무는 그곳으로 추방당해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다 양을 키우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절의를 지키며 살아간다.

소무가 흉노땅으로 들어간 다음해, 이릉은 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토벌의 장수가 되어 5,000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해 훙노의 5만 병사를 대적해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포로가 된다.

소식을 들은 무제가 격노해 이릉의 일가를 몰살시키는 형벌을 내렸고 이릉도 이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와 슬픔으로 절망하던 중, 흉노왕 선우가 그를 빈객으로 후하게 대접하자 마음을 돌려 흉노 땅에서 적응하며 살아간다.

이런 두 사람의 비극적인 스토리에 또 한사람, 역사가 사마천이 가미되어 3인의 유명한 역사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당하고 발분하여 불후의 대역사서 사기를 집필 완성하게 되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적지 흉노 땅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된다. 이릉이 선우의 명을 받아 소무를 찾아간다.

이릉이 소무에게 주연을 베풀고 위로하면서 “선우가 나를 보내 그대를 설득하여 데리고 오라 하였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데(人生如朝露) 그대도 이제 그만 고생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소무는 거절했고, 이릉은 혼자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릉은 소무의 궁핍한 생활을 딱하게 여겨 소무를 도와주었고,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열고 교류하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한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해 흉노 땅에 특사를 파견해 소무는 풀려나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갔다. 소무는 이릉에게 같이 귀국할 것을 권하지만 이릉은 거절하고 흉노땅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게 된다.

이릉은 귀국하는 소무와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서로가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주고받고 또 소무의 귀국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연락한다. 두 사람이 석별하면서 나눈 시와 귀국후 교신한 사연들은 후대에까지 전해 내려와 후세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 이릉과 소무가 헤어지는 장면 /위키피디아(중국판)

 

 

▲ AD 1세기 흉노와 한나라 /위키피디아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몽골 알타이 산악 지역의 한 무덤을 발굴조사하다가 오래된 미라를 발견했는데, 그 무덤의 주인은 중국식 복장을 했다고 16일 발표했다.

정확한 위치는 러시아와 몽골 국경을 지나는 알타이 산맥의 남쪽 시베트 하이르한(Shiveet Khairhan) 유적 가운데 파지릭 고분이다. 이번 조사는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과 공동으로 진행되었다.

파지릭 고분은 기원전 5∼3세기 무렵, 몽골과 러시아 알타이 산악 지역에 분포하였던 스키토-시베리아(초기철기시대) 유목 문화기에 만들어진 돌을 사용한 무덤이다. 대체로 흉노가 지배하던 시기와 영역이 겹친다.

 

▲ 몽골 시베트하이르한 고분군 출토 남성 미라 /문화재청 제공

 

이번 조사에서 소형 고분에서 남성 미라가 발견됐다. 그 미라는 신장 165~170cm로, 당시로는 키가 큰 편이었다. 미라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몸통 피부조직 일부와 상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반신 옷은 두루마기와 같이, 곧은 깃이 달린 겉옷인 직령포(直領袍)였으며, 하반신 옷은 삭아서 없어진 상태였다.

고고학자들이 탄소 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옷의 제작 시기가 기원 후 1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무와 이릉의 스토리가 기원전 1세기를 배경으로 엮어졌으므로, 그 뒤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재미 있는 사실은 2,000년만에 미라로 돌아온 사람이 중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첫째 미라에서 발견된 웃이 당시 중국 중원 지역에서 유행한 복식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 미라 발굴로 이 일대가 동서 문화 교류의 요충지였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둘째 미라가 입은 옷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향해 여미는 우임(右衽) 형식으로 중국인들이 입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중국인은 옷깃을 오른쪽을 향해 여며 입고, 북방의 흉노족은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좌임(左袵)의 방식을 취했다. 당시 옷을 보고 한족인지, 이민족인지를 구별했다. 흉노족 귀족을 매장하면서 중국식 복장방식으로 매장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미라의 주인공이 흉노족일수도 있다. 추가 조사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 미라에서 벗겨낸 직령포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이릉은 소무를 만나 “나는 이제 오랑캐 옷을 입었소”라고 말했다고 사마천은 소개했다. 그러면 이릉은 좌임의 옷을 입었고, 소무는 우임의 웃을 고집했다는 얘기다.

무덤에서 나온 옷은 견직물이라고 하니, 고급 비단으로 만들을 것이다. 소무는 귀국했고, 이릉은 끝내 흉노 땅에 남아 세상을 떴다. 이릉이 죽어서도 좌임의 오랑캐방식으로 옷을 입었을까.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아 알길이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8월 7일, 몽골 현지에 직물 보존처리 전공자를 파견해 미라에 붙은 복식을 분리, 응급 보존처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수습된 복식은 현재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에 보관하고 있으며, 10월 중으로 국내로 들여와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추가 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DNA 분석과 안정동위원소 분석 등을 통해 이 남성의 유전학적 정보와 식생활 등도 확인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에 몽골 고분에서 발굴된 중국식 복장 미라에서 2000년 전에도 중국과 흉노 사이에 전쟁이든, 조공이든, 무역이든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 미라 세부 /문화재청 제공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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