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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자존심 지킨 이우 왕자…해방된 날 장례

기사승인 2017.10.13  16: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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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희생…한국 여인과 결혼한 꽃미남 왕자

 

1945년 8월 15일. 36년에 걸친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날이다. 이날에 조선 왕실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후 1시경 경성운동장. (해방후 서울운동장이라 했고, 나중에 동대문운동장이라 불리웠다.)

조선육군사령부 주관 장례식이 치러졌다. 경성운동장은 1925년 일본 황태자인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어진 상징적 공간이다.

누구의 장례식일까? 비운의 왕자, 꽃미남왕자,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李鍝)의 장례식이다. 원래 12시 예정이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다는 천황의 항복방송으로 늦추어진 것이다. 조선왕가의 비운의 왕자 장례식이 하필 천황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공간에서 항복 방송을 하는 엇비슷한 시간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게 아닐까.

 

▲ 이우 왕자 /위키피디아

8월 6일 히로시마, 출근길.

하늘에서 내려오는 원인모를 육중한 물체가 무엇인지 바라보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다. 출근이 늦어 전속부관이 찾아 나섰다가 길바닥에 거꾸러진 이우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8월7일 절명하였다.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죽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죽어 해방 후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이우 왕자는 영화 『덕혜옹주』에서 독립군을 도와 영친왕 상해망명을 주도했던 고수가 분한 사람이다. 영화 속의 사실 여부를 굳이 논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왕족 중에서 가장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고 실지로 그렇게 살다 간 사람이다. 1912년생이니 고모인 덕혜와 동갑이다.

 

경성유치원과 종로소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10살 나이에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유년육군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급우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본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경쟁의식도 남달라 공부뿐 아니라 운동 등 모든 면에서 일본급우들보다 우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족자부심이 대단하여 술자리에서는 늘 조선 노래인 ‘황성옛터’를 불렀다.

 

일제의 조선왕실 관리부서 이왕직(李王職)과 크게 마찰을 빚게 되는 것은 역시 결혼문제였다. 그는 일본 황실가와의 결혼 요구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 박찬주와 결혼식 장면 /위키피디아

마음속의 여인이 있었다. 박찬주(朴贊珠).

그녀는 갑신정변의 주역 금릉위 박영효의 손녀딸이다. 박영효는 이우의 아버지 의친왕 이강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자연히 집안의 왕래가 있었다. 박영효는 강화도령, 철종이 후궁 사이에서 낳은 영혜옹주와 결혼한 왕실의 부마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가에 주었던 가장 높은 작위인 후작을 받은 친일파의 거두로 변질되었다. 박찬주는 광복후 중앙여고와 추계대학 설립자인데 역시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이우와 박찬주는 일본유학시절뿐 아니라 장충단공원에서도 데이트가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왕직(李王職)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은 성사되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운현궁 안에 있는 서양식 양관에서 생활하였다. 지금은 이 건물을 덕성여대에서 사들여 평생교육원으로 쓰고 있다.

이우와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이청은 아버지 사망 후에 일시적으로 공위를 계승하여 '이청 공 전하'로 불리었으며, 미국 마케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설계사무소 엔지니어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은 브라운 대학교 유학 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우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후에 중국에 파견돼 군생활을 한다. 그곳은 중국팔로군과 조선 의용군이 합세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는 곳이었다. 조선의용군을 자주 만날 개연성이 큰 환경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그들을 지원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그의 육사 동료에게 조선인으로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치욕스럽다고 했다. 전쟁 막바지, 일본의 패색이 깊어질 때 일본 본토 귀환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조국 조선군 사령부의 근무를 희망했다. 심지어는 설사약을 먹고 귀대일자를 차일피일 미룰 정도였다. 아까운 한 왕자의 죽음을 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제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조국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왕실가의 사람들도 힘든 삶을 살다가 죽어갔다.

 

일본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 20만명 나가사키 14만명이 죽었다 그중 한국인 사망자는 4만명이다.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5만명과 나가사키에 살던 4만명의 한국인중 4만명이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다. 집계로 보면 세계원폭희생자중 우리나라가 일본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다. 그 억울한 조선인들 사이에는 이우와 같은 왕실가 사람도 있다.

 

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며 “이우는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그의 혼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원치 않는 일본인의 제삿밥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태평양전쟁 전몰자 240만여명이 모셔져 있는, 그중 2만여명이 조선인이다. 이우의 자손들이 끊임없이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명단에서 삭제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있다.

원치 않는 볼모성 유학으로 일본에 끌려가서, 일본학교를 나와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일본군복을 입고, 적이 아닌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다가 고국도 아닌 일본 땅에서 죽은 것도 원통한데... 죽어서도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아베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절을 받고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우의 삶과 죽음이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김송현 기자 ksh@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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