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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굴복시킨 홍이포…아시아 운명 바꿔

기사승인 2017.10.06  17: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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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만 가졌던 비대칭전력, 후금도 개발…조선군엔 치명적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가 쏜 포탄에 행궁과 성벽이 무너지고 신하들이 허겁지겁 도망다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조실록』에는 청병이 첫포를 쏜 1637년 1월 24일자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둘째날(1월 25일)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했다. 작자 미상의 『산성일기』에는 1월 24일자에 “적이 남성(南城)을 침범하고 종일토록 행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철환(鐵丸)이 사발 같고 삼층 기와집을 뚫어서 한자가 넘게 들어갔다”고 적었다.

이틀간의 포격을 당한 조선임금 인조는 닷새후인 1월 30일 송파 벌로 내려가 청의 칸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한다. 식량이 떨어졌기도 하거니와 청군이 보유한 포의 위력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살고자 한다”며 최명길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청군이 조선군에 비해 압도적 전력을 확보한 것은 비단 병력 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청나라는 당시로선 동양에서 최신식 포를 갖추었다. 그 포가 바로 홍이포(紅夷砲)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앞서 1월 22일 청군은 강화도로 도망간 봉림대군(나중에 효종)과 빈궁, 조정대신들을 포로로 잡아 인조임금의 농성 의지를 약화시킨 것도 홍위포였다.

『인조실록』은 이 장면을 “오랑캐 군사 3만이 갑곶진에 진격하여 잇따라 홍이포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조선군이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고 기록했다.

 

후세 역사학자들은 남한산성에 웅크리고 주화, 주전파가 싸우는데 몰두했다고 자국 역사를 깎아내리는데 열을 올리지만, 청군이 조선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한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군사력에서 밀렸기 때문에 약자들의 논쟁, 즉 사대(事大)의 대상을 청(淸)으로 바꿀 것이냐, 명(明)을 고집할 것이냐의 말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홍이포의 포격에 겁먹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 강화도 초지진에 보관된 홍이포 /방위사업청 블로그 캡쳐

 

그러면 홍이포는 과연 어떤 무기인가.

홍이포는 16세기 동아시아로 식민거점을 만들기 위해 진출하던 네덜란드의 포였다.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몸의 털 색깔이 붉다”고 해서 홍모(紅毛) 또는 홍이(紅夷)라고 했다. 즉 서양 오랭캐의 포다. 서양에선 이를 캘버린포라고 했다.

명 말기에 베이징에 체류하던 독일 출신 신부 아담 샬(Adam Shal)이 명의 예부상서 서광계(徐光啓)에게 제작기법을 전해줬고, 명 조정이 홍이포를 수입해 자체 제작이 가능하도록 기술을 완성했다.

홍이포의 크기와 무게를 살펴보면, 구경이 약 77.8㎜, 포신 길이가 186.6㎝, 포신 무게는 약 298㎏이었다. 사정거리는 최대 9㎞ 가까운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유효 사정거리는 2.8km 이내였다고 한다. 홍이포는 당시까지의 어떤 대포보다도 물리적인 파괴력이 우수했고, 니라 적의 사기를 꺾는 데도 아주 위력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명나라 군대는 홍이포를 구비하지 못했다. 조선의 요청으로 출병한 명군은 불량기포(佛朗機炮)를 가져와 평양성 공격에 사용했다. 당시 현장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조선 대신 유성룡(柳成龍)은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불량기포의 위력은 과연 천하무적이었다”라고 소감을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 기록했다. 불랑기포는 프랑스를 뜻하는 프랑크(Frank)에서 나온 말로 이 또한 서양에서 전래한 포였다. 하지만 서양은 불랑기포를 뛰어넘는 홍이포를 개발해 장착하고 동아시아 해안에 출몰했고, 명나라는 오랑캐와의 전쟁을 위해 이 최신식 포를 확보해 두었다.

 

홍이포가 동양의 전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26년 정월, 만리장성 근처 영원(寧遠)성 전투에서였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의 군사력이 집중된 산해관(山海關)을 피해 주변 성인 영원성을 만만히 보았다.

당시 명의 장수는 원숭환(袁崇煥).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주둔한 명군의 다섯배인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요하를 건넜다. 공성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후금군은 인해전술로 성벽에 바짝 붙어 구멍을 내고 공격했다. 이때 원숭환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11문의 홍이포였다. 명군은 포문을 열었다. 후금은 당시 홍이포의 위력을 몰랐다.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대포소리가 나면서 후금군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후퇴를 모르고 돌진하던 후금의 팔기군은 두려움에 떨면서 진격을 하지 못했다.

후금은 그후 두어차례 성벽 접근을 시도했지만, 능수능란하게 홍이포를 쏘아대는 명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공격이 늦춰지면 보급선이 끊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퇴각을 명령한다. 이때 누르하치는 명군이 쏜 홍이포의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첫 패배였다. 심양(瀋陽)으로 퇴각한 누르하치는 “나는 스믈다섯살 때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싸웠는데 이때까지 공격해 점령하지 못한 성과 요새는 없었고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원성만은 점령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그해 8월 누르하치는 항간의 소문처럼 홍이포의 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도졌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홍타이지(청 태종)가 그 뒤를 이었다.

만일 청이 홍이포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만주에 한정된 변방 오랑캐정권에 머물렀을 것이다.

 

▲ 1626년 영원성 전투 /위키피디아

 

홍타이지는 홍이포의 위력을 알게 됐다. 그 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명나라와의 대결은 이길수 없다고 판단했다.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 칸이 된 이듬해 1627년 조선을 침공했지만(정묘호란), 그땐 후금군이 홍이포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선과 후금 사이에 형제국으로 한다는 내용의 협약이 체결되고 퇴각했다. 홍이포를 갖춘 명군이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에 후금이 조선에 오래 머물수 없었을 것이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만이 보유하고 있는 비대칭무기인 홍이포 입수에 전력을 투구했다. 곧 기회가 왔다.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永平)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찾아내 포로로 압송한 것이다.

명나라의 입장에선 홍이포 제작기술이 핵무기와 같이 이전을 하면 안되는 기술이었다. 그것을 후금군이 훔쳐냈고, 명나라는 그 기술을 잃은 것이다. 남은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그 기술을 확보해 대량의 홍이포를 만들때까지 명나라는 후금을 제압해야 했다. 후금은 서둘러 홍이포 기술 개발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홍이포라는 비대칭무기를 대칭 무기로 전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포로로 잡아온 한족 장인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무기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했다. 기술을 완성한 후 한족 장교와 장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 결과 만주에서 홍이포를 주조하게 된 것은 1631년 6월이었다. 기술을 훔친지 2년만이었다. 오랭캐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던 홍타이지는 홍이포의 이(夷)라는 글자가 오랑캐를 뜻한다고 해서 홍의포(紅衣砲)라고 이름을 바꾸고, 대량제작에 나섰다. 1631년 8월 대릉하(大凌河) 공격시에는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를 가졌다. 난공불락이라던 대릉하는 홍이포의 덕분에 함락되었다.

 

▲ 홍타이지(청 태종) /위키피디아(중국판)

홍이포 기술을 확보한지 5년후인 1636년 12월 홍타이지는 포병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 남한산성을 멀리 보이는 망월봉에 포대를 설치해놓고 조선 임금이 굴복하길 기다렸다. 한달이 지나도록 조선이 굴복하지 않자 홍이포를 쏘았고, 닷새후 인조 임금은 삼전도로 내려갔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부왕이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다가 마침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을 통해 홍이포 제조기술과 사용법을 알아 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남만(南蠻, 남쪽 오랑캐라는 뜻)대포 12문을 제작해 강화도에 배치했는데, 이 대포가 바로 홍이포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는 홍이포를 앞세워 명나라 정복에 나서 성공한다. 후금이라는 지방정권을 청이라는 중앙정권으로 만든 것은 바로 최신식 무기였다.

강화도에 가면 홍이포를 볼수 있다. 하지만 그 포는 19세기말 서양과 일본의 배들이 침공해올때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사이에 그보다 더 강력하고 멀리나가는 포가 개발되었고, 최신식 포를 장착한 선단에 의해 조선은 또다시 굴복당해야 했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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