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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은 자결하지 않았다…각색 심한 『남한산성』

기사승인 2017.10.05  16: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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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 색채 가미하기 위해 원작 소설 중 여러 곳에서 각색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원작 소설을 여러 곳에서 각색했다. 영화의 재미를 고조시키기 위해서인 듯 보이지만, 김훈의 『남한산성』이 갖는 패배주의적, 무력감을 벗어나 약간의 민족주의 성향을 보내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민족주의를 넣지 않고 원작 소설 흐름을 따라 영화를 만들었으면 적어도 영화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역사 사실을 상당히 왜곡했다.

김상헌이 자결하는 모습은 느닷없이 넣었는데, 그것도 일본 사무라이들이 할복하는 모습을 대입시켜 작가의 국적을 의심케 했다. 소설에서 김상헌은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지만(실제는 단식) 동료 선비들의 만류로 살아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실제 김상헌은 전쟁이 끝난후 3년이나 조선땅에 살다가 1640년 청나라에 끌려가 투옥된다. 1945년 김상헌은 소현세자를 모시고 귀국했다가 1652년 생을 마쳤다. 병자호란후 15년이나 더 산 사람을 영화는 국수주의적 감동을 더하기 위해 일찍 죽인 것이다.

이시백이 성벽에 나가 청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과장이 심하다. 조선군은 성에 웅크리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모습도 민족주의적 각색이라 할수 있다.

서날쇠가 도원수 진영을 찾아가 칼부림을 벌이는 장면, 최명길이 청태종(칸) 홍타이지를 찾아가 전투 중단을 요구하는 모습, 영의정 김류가 최명길과 함께 용골대를 만난다는 설정들도 원작 소설에 없는 내용이며, 나름 의도성을 갖는 각색이다. 민족주의 성향을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네이버 영화

 

1936~37년 병자호란(인조 14년) 때 남한산성으로의 47일간 몽진(임금의 피신)은 역사학계의 주요 연구대상이었고, 정치권에서도 논쟁의 대상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지켜기 위해 청나라 군대와 싸워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진다는 스토리다.

전투는 없었다. 청 태종은 맘만 먹으면 먹을수 있는 성을 그대로 두었다. 성을 에워싼채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40여일간의 말의 전쟁 끝에 인조임금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며 상황을 종식시킨다.

 

역사학자, 소설, 영화등에서 인조임금이 잠실 벌로 내려와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禮)를 한 사실을 놓고 ‘삼전도 굴욕’이라고 한다.

굴욕은 맞다. 임금이 야만인(오랑캐)의 수장에게 절을, 그것도 큰절 세 번하고 고개를 아홉 번이나 숙였으니, 굴욕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앞서 조선의 임금들은 정월 초하루에 북경을 향해 명나라 황제에게 예를 갖춰 절을 했다. 보이지도 않는 먼 곳을 향해 상국의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더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다가 장군이 북경을 향해 절을 하는 대목에서 보면, 우리가 그렇게 떠받드는 성웅 이순신이 그런 사람일까 의아해한 적이 있다.

한족의 황제에 절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고, 오랑캐의 황제(칸)에게 절하는 것은 굴욕이라는 인식이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다. 스스로 소중화라고 자부했던 조선 사대부들이었다.

어쩌면 인조 임금에게는 큰 은혜를 입은 것일수도 있다. 승전국인 청나라는 왕을 죽이거나 교체하지 않았다. 몽골(元)이 고려를 지배할 때 숱하게 임금을 교체하던 것과 양상이 다르다. 청나라가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을 끌고 간 것은 엄청난 손실이었지만, 그 희생을 토대로 조선 왕실은 생명을 부지했고, 그후에 청나라가 왕실의 조공·책봉에 간여한 일은 명나라와 다를 바 없다.

결국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삼전도의 굴욕’이 아나라, ‘삼전도의 기사회생’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50년후 1882년 조미통상수교조약을 맺을 때 ‘조선이 독립국이다’는 제1조를 놓고 조선 왕실이 청 나라에 얼마나 눈치를 보았던가. 동학혁명이 발발했을 때 조선은 청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을 뿐, 조선은 상국에 대한 사대와 의존을 버리지 않았다.

 

대륙의 권력이 변동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세력에 온존하던 사람들이 척화파, 주전파이고, 현실의 세력을 인정하자는 세력이 주화파일뿐이다. 최명길이든 김상헌이든,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던 사람이 아니다. 명이냐, 청이냐를 놓고 의견충돌을 벌이던 지도층들이다. 어느 강대국을 사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냐의 논쟁이었을 뿐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청나라에 끌려가 옥살이하면서 만난 적이 있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었다. 청이든, 명이든 조선에겐 중국의 상국일 뿐인데, 누구에게 사대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다.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은 전쟁이 끝난후 우의정, 영의정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642년 임경업등이 명나라 잔당들과 내통하고 조선에 반청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진노한 청나라에 의해 불려가 구금되었다.

1644년 명나라가 명망하자 김상헌은 이렇게 시를 읊었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奉節朝周昔作賓)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皇恩如海到陪臣) /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天翻地覆逢今日)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未死羞爲負義人)

김상헌은 명나라를 끝까지 흠모하던 인물이다. 주전론자라고 각색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김상헌의 후손은 조선후기에 세도를 펼친 안동 김씨들이다. 명분 하나로 살아가던 그의 후손들이 조선의 주류세력이었으니….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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