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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한국전 출병한 속사정…당내 권력 갈등

기사승인 2017.09.30  10: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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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실력자이자 친소파인 가오강 제거…전쟁후 지방군벌 약화 위해

 

지난 8월 16일 미국의 조지프 던퍼드(Joseph Dunford) 합참의장이 중국을 방문하던 중 느닷없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북부전구 사령부를 방문해 지역 사령관 쑹푸쉬안(宋普選) 상장을 만났다. 던퍼드 의장이 방문한 곳은 북한 국경에서 200km 떨어진 곳으로, 한반도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국군의 개입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던포드의 방문후 북한은 공식 성명을 통해 중국에 대해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며 중국을 향해 극렬히 반발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 긴장관계가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대결구도는 사실상 선전포고 단계에 이르렀고, 미국은 동해 북쪽 깊숙이 최신 전투기를 투입해 북한을 위협했다.

우리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 벌어지는 말의 전쟁과 핵실험, 군사훈련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만주의 중국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6·25 때 중국군(중공군)이 한반도에 참전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위 군 수뇌부는 중국군 동태를 살피러 현장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67년전인 1950년, 중국(우리는 중공이라 불렀다)은 어떻게 만주 군대를 동원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일견할 수 있다.

 

한국전 발발 초기만 해도 중국은 참전할 계획도, 의사도, 여력도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한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인데다 중국 남부에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의 전투가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반전은 미국의 참전. 1950년 9월 15일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북한군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국군은 곧바로 압록강에 도달해 그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

그해말 중공군이 참전한다. 그 배경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동서냉전의 기류가 악화되는 가운데 공산 진영의 수호를 위해 ▲소련의 파병 종용에 따라 ▲북한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불리한 입장에 처한다는 지정학적 이유에 의해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해석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 2차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소련군 침공. /위키피디아

 

그런데 여기서 6·25 전후의 중국 공산당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언을 고하며 중국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내전 초기 국민당 군대는 미군이 물려준 무기에 힘입어 각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민당 정부를 타도하려면 대략 5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장기간에 걸친 고난의 투쟁을 할 준비를 했다.

전세의 역전은 만주에서 발생했다. 2차 대전 마지막 장에 소련군이 만주로 밀려 들었다. 소련군은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을 해체한 후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거하고 장춘(長春)철도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청나라 말기 옛러시아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주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보였다.

소련군은 만주에 활약하던 공산군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당시엔 국민당군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군과 싸워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중공의 입장에선 소련군의 지원이 수세에서 벗어나는 좋은 기회였다. 화북지역에서 활약하던 공산당 세력은 동북3성에 무장세력들을 대거 파견했다.

소련군의 묵인 아래 동북으로 진입한 공산군은 현지의 무장세력들을 흡수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해 1945년 12월에는 10개 군구 약 27만여명에 달했다. 또 소련군은 투항한 관동군으로부터 접수한 무기의 태반을 공산군에게 넘겼다. 동북 지역에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균형을 이루는 듯 보였지만, 국민당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1948년 가을이 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공산군은 요동지역의 국민당군을 포위했고, 장제스가 네 번이나 선양(瀋陽)에 날아와 반격을 지휘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10월 17일에는 창춘이, 11월 6일에는 선양이 함락되면서 국민정부군은 전멸했다.

동북3성을 공산군에게 넘겨주면서 두 세력의 균형이 무너졌다. 만주에서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은 순식간에 대륙을 집어 삼켰다. 1949년 1월 21일 장제스는 총통 자리에서 하야를 선언했고, 11개월 뒤 대륙의 마지막 거점인 청두를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중국 대륙이 공산세력에게 무너진 것은 만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 배후엔 소련군의 지원이 있었다.

 

▲ 가오강. /위키피디아

마오쩌둥은 1945년 만주에 당의 핵심간부 가오강(高崗)을 동북3성의 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러면 가오강은 어떤 인물인가. 산시(陝西)성 출신인 그는 1927년 산시성 북부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하며 공산당 서북 근거지를 창시했다. 그러다 국민당에 쫓긴 마오쩌둥 군대가 도착하자(長征), 마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마오 군은 1만명 정도로 축소되었을 때였으니, 마오의 입장에선 가오강이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가오강은 친소파였다. 공산종주국인 소련의 도움을 받고 소련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주장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시기에 마오는 그를 필요로 했다. 소련이 점령한 만주지역에 가오강을 보낸 것도 소련과 좋은 관계를 맺어 만주를 국민당 손에서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만주를 완전히 내지화한 적은 없었다. 몽골(元)과 여진(金, 淸)이 중국을 지배할 때 만주가 중국 영토였지만, 한(漢) 당(唐), 송(宋), 명(明)나라의 한족 정권 때에는 만주가 이민족의 땅이었다. 2차 대전 말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150만명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해 점령했다. 소련군은 장제스가 외몽골을 승인하는 조건하에 1946년 3월 만주에서 철군했다. 하지만 소련은 철군후에도 만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뤼순과 다롄에 일부 군대를 남겨 놓았고, 만주 철도를 운영했다.

 

가오강은 소련을 뒷배경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2차 대전 종전후 만주는 일본이 대륙침략기지로 산업화시킨 덕분에 중국내에서 산업시설이 발달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소련군이 관동군에 빼앗은 무기도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다. 국공내전에서 가오강의 군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북3성의 제4야전군은 중국 전역의 6개 군관할지에서 최대, 최고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오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입장에선 어제의 동지가 견제세력이 된 것이다.

1949년 8월 베이징의 중앙 정부는 만주 행정기구를 동북 인민정부로 개편하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부주석으로 승진한 가오강은 지역군벌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북지역의 관공서에는 마오의 초상화 대신에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렸다. 베이징 정부가 마오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1949년 12월 마오가 선양에 들렀을 때 자신의 초상화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동북3성이 중국 땅이 아니라 소련령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북한의 김일성이 눈치챘다. 소련의 배경으로 북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베이징 정부보다는 동북 제1서기인 가오강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마오로서도 국민당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더 이상 만주에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이 후원하는 북한의 일을 모른척 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타이완과 한국 방위에 개입했다. 해군력이 전무하다시피한 마오 군대는 타이완 해협을 진주한 미 해군에 가로막혔다.

전세가 바뀌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만주가 위협을 당하자 1950년 10월초 베이징에선 중공 지도부들 사이에 한국전 참전 여부에 대한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중공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았다.

정무원 총리겸 외교부장인 저우언라이(周恩來), 베이징 군구사령관 에지엔잉은 한국전 참전을 반대했다. 항일 전쟁과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인민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동북 제4야전군 사령관이었던 가오강은 적극 반대했다. 휘하의 군대가 한반도에 직접 투입되어야 한다고 직감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팽더화이(彭德懷)는 소련군의 지원이 있다면 참전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마오쩌둥의 의향을 찔러보았다. 마오의 생각은 참전이었다.

마오의 지론은 미군이 북조선군을 끝까지 추격하면 동북(만주)가 위태로워지고, 동북이 전쟁터가 되면 자산가 계급이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므로 출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지론은 결론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전 참전을 반대하던 주더(朱德)도 순망치한론을 펼치며 참전으로 돌아섰다.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이 사자성어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때 중국이 조선에 출병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6개 지강 구역도 /그래픽=김인영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마오는 단순히 만주를 전쟁터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순망치한의 이유만으로 참전을 주장했을까. 경쟁자이자, 친소파였던 가오강의 군대를 무력화시키자는 속셈도 있었다는 평가다. 마오는 내전이 끝난후 소련을 극도로 미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친소파이자, 경쟁자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막강한 가오강과 그 군대를 전쟁터에 보내 무력화시키겠다는 속셈을 드러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다. 동원 군대는 가오강이 지휘하는 제4야전군. 그렇다고 가오강에게 지원군 총책을 맡기지 않았다. 가오강의 위에 팽더화이를 붙였다. 항미지원군 총사령관은 팽더화이, 가오강은 병참 지원을 맡았다. 가오강의 제4야전군은 한국전에서 20여만명이 사망했다. 1952년 가오강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에 지명되면서 베이징으로 불려 들어갔다.

 

한국전 종전 직후 1953년, 중국 공산당 내에선 건국후 첫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만주의 지도자인 가오강과 화동의 군정 주석이자 상하이 시장인 라오수스(饒漱石)가 연합해 소련의 경제발전제도를 받아들이자며 당 지도부의 지도체제를 비판했다. 가오강과 라오수스는 당이 기업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 기업을 독자책임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劉少奇)등 지도부가 추진하는 집단지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마디로 군벌화한 지방 세력과 중앙지도부와의 첫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첫대결에서 마오의 중앙당이 승리했다. 마오 세력은 가오강과 라이수스를 숙청했다. 이유는 소련과 연계하여 만주 지역을 ‘독립왕국화’하려는 기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예방 조치라는 것.

사실 갓 태어난 중공의 입장에선 청나라 말기에 지방이 군벌화한 것을 경계했고,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각 지역의 권력을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 타깃이 가오강과 라이수스였다.

중국 공산당은 지방을 여섯 개 지구로 개편했는데, 가오강이 제4야전군으로 동북지역을 장악했고, 라오수스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지역이 연대하면 중국이 다시 분열될수 있다고 마오의 당 지도부는 생각한 것이다.

가오강은 1954년 체포되자 자살했고, 라오수스도 실각한후 구금되었다. 가오강의 숙청은 중국 동북지역 만주가 친소 기지화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제2의 몽골 공화국'의 싹을 초기에 끊으려는 시도였다.

그에 앞서 마오는 막강한 가오강의 군대를 한국전 전선에 투입해 약화시키고 가오강을 전선에서 떼어 중앙으로 불러 들였다가 사상투쟁을 거쳐 제거한 것이다. 6·25 때 중공군의 참전은 중국 공산당 권력갈등의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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