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富)의 사표(師表), 경주 최부자집의 육훈(六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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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의 사표(師表), 경주 최부자집의 육훈(六訓)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7.06.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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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사진=배남효

[필자=배남효] 나는 경주에 살면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농담 비슷하게 경주의 3곳 명소를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구경을 시켜준다.

그 첫번째는 약간 우스운 주장이지만 나의 집인데 일단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집안에 나무가 많아 수종(樹種)60가지가 넘으니 집마당에서 나무를 감상하면서 놀만해서 그렇고 또 바로 집 뒤에 금척고분군이 넓게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두번째가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인데 삼국 통일의 토대를 닦은 대왕의 뛰어난 리더쉽도 추모하고 왕릉도 보기 좋고 지세(地勢)도 좋아 길게 펼쳐진 왕릉의 둘레를 한바퀴 산책하면 대왕의 웅지(雄志)도 느끼고 자신의 마음도 정리되기 때문이다. 남북이 분단된 오늘의 현실에서 대왕과 같은 탁월한 통일 추진 리더쉽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곳을 탐방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하겠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교동의 최부자집으로 경주의 역사 유적을 뛰어넘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부()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부의 집중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빈부 격차가 커다란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이 시점에  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베풀고 나누는 정신을 배울 수 있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너무나 훌륭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침 사흘 전에 교동 최부자집을 혼자서 바람도 쐴겸 다녀왔기 때문에 최부자집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경주 교동에 가면 그 유명한 최부자집이 있다.

경주 법주를 직접 만드는 오래된 아담한 한옥이 있고 바로 오른쪽에 붙어 새로 수리한 한옥으로 된 최부자집이 넓다란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곳을 여러번 와봤는데 올 때마다 집터가 양지바르고 편안한 평지여서 참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경주에서 집을 구하러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 봤기 때문에 나는 다른 곳에 비해 이곳이 좋은 지형(地形)이라는 것을 첫눈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최부자 집 앞에는 이 집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적혀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명부(名富)의 격조와 품격을 갖춘 최부자

경주교동 최씨고택(중욤민속자료 제27) 경주시 교동 69번지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이 넓고 큰 최씨고택은 1700년쯤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했다고 전해지며 주변으로는 경주향교와 고분, 재매정 등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최씨고택은 건축 당시향교 유림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뜻을 수용하여 향교보다 2계단 낮게 터를 깍아내고 지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이 고택은 원래 99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 사랑채는 화재로 불탔으나 최근 큰 사랑채를 복원하였고 작은 사랑채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사당은 큰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작은 사랑채 뒤편에 배치되어 장엄한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사랑채에는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으며 흉년이면 굶주린 백성을 위해 곳간을 열었다, 이 넒은 집안 구석구석 빛바랜 곳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최부자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최부자는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명의 진사를 배출하였다,

 

경주 최부자집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나는 탈렌트 차인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최부자집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면서 그 역사와 사연을 많이 알게 된 적도 있었다.

최부자집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독특하고 흥미로운 가문으로 청부(淸富)라 불리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부자집으로 이른바 귀족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대표적으로 잘 실천한 보기드문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12대를 거치며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석(萬石)의 재산을 지키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면서 이 집안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여섯 가지 가훈(家訓)인 육훈(六訓)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육훈은 최부자집 안채의 담벼락 앞에 표지판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은 하지 마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6.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또 육연(六然) 이라 하여 수신의 도리로 밝힌 여섯 가지도 같이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1. 자처초연(自處超然) : 혼자 있을 때 초연하게 지내라

2. 대인애연(對人靄然) : 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라

3.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4.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과감하게 대처하라

5. 득의담연(得意澹然) : 뜻을 얻었을 때 담담히 행동하라

6.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

 

육훈은 이미 많이 알려졌고 또 아주 쉽게 표현된 가훈이라 별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금방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육훈 중 1, 2번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집안을 지키는 계율과 같고, 3, 4, 5는 사회와 이웃에게 다해야 할 기본 도리를 밝혔고, 6은 여성들이 불평할 수 있는 측면이 있겠으나 집안 살림을 절약 검소하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최부자집 육훈은 단순히 말로서만 내세운 가훈이 아니라 400여년 걸쳐 실제로 실천되어온 행동지침이기에 엄청난 가치와 무게로 우리들의 가슴에 다가오고 감명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돈을 아끼는 애착이 있고 돈을 더 벌려는 욕망이 가득한데 이것을 넘어서 한계를 지키고 베푸는 돈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실천한 최부자집의 육훈은 오늘날 공존하는 삶을 위해 최고로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부자가 천당을 가는 것이 낙타가 비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는데 이 육훈을 지키는 부자는 다 천당을 갈 수 있을 것 같고 아마 최부자집 식솔들은 모두 천당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부자들이 이 육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지 궁금한데 아마 대부분 따르기 힘들 것 같아 보인다.

왜 이렇게 좋은 가훈인 육훈을 부자들이 따르기 어려운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가난한 나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부자들이 이 곳에 와보고 많이 배워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연은 사람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처신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항목마다 연()이 붙어 몸에 베인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이른바 동양의 신사인 군자(君子)의 모습을 견지해야 함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정말 멋있는 말이 육연 속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육연을 다 지킬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나도 그동안 나름대로 수신을 해와서 조금은 흉내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6번의 실의태연은 간이 적어서 그런지 잘 흉내내기가 어려워 실의하면 금방 기가 죽어버려 부끄러울 때가 가끔 있기도 하다.

그래도 늙어 죽을 때까지 명색이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 육연을 자연스럽게 처신할 수 있도록 거듭 노력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최부자집 건물에 대해서도 안내판에서 설명하고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 형식을 취했으나 화려하지 않으며 순수하고 평범한 모양으로 약간 낮게 지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가서 오른쪽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큰 사랑채인데 2006년에 복원하였으며 용암고택(龍庵古宅)이라는 현판이 정면에 붙어 있고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면암 최익현, 스웨덴의 쿠스타프 국왕, 의친왕 이강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

작은 사랑채터가 있는데 불에 타서 지금은 주춧돌만 흩어져 있고 이 주춧돌은 반월성 왕궁기둥을 받치던 돌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곳간은 창고로 이 집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건물인데 현존하는 목재 곳간중 가장 크고 오래 되었으며 정면 5, 측면 2칸의 전통 한옥으로 상당히 크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 곳간의 규모가 그냥 눈으로 봐서도 대단히 커서 최씨 집안의 부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안채는 자 형태로 지어졌는데 원래는 899칸 규모였으나 현재는 3채만 남아 있고 여성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라 장독대도 놓여 있어 아담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당에는 정원이 만들어져 나무들이 심겨져 있는데 석류나무가 꽃이 붉게 피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 있으며 산수유 나무들도 커다랗게 자라 잎이 무성한 신록을 이루고 있으며 뒷마당에도 단풍나무와 다른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방문객들이 쉬지 않고 드나들면서 외국인들도 보이고 나무들과 건물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어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러한 최부자집 실상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 배우게 하려는 취지에서 최근에는 ()경주 최부자 선양회가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현장체험 학습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고생이나 일반 사회인들이 단체로 참가하여 이용하고 있는데 아마 이런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서인지 전에 없었던 최부자 아카데미 건물이 최부자집 바깥 오른쪽으로 떨어져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민간단체에서 이렇게 소규모로 하기 보다는 국가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나서 박정희 정권때 국민교육헌장을 보급하듯이 최부자집의 육훈을 국민경제헌장 식으로 보급시켜 어릴 때부터 부에 대한 관념을 똑바로 세울 수 있도록 만들면 우리 사회의 약육강식 자본주의 폐해를 줄이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경제윤리를 높이는데 엄청난 기여를 할 것으로 확신한다.

아울러 육연도 국민생활헌장 식으로 보급하여 어릴 때부터 몸가짐과 처신을 반듯하고 단정하게 하는 습관을 길러나간다면 국민 개개인의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 사회도 한단계 성숙하는 길로 가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전국의 곳곳에 대대적으로 육훈과 육연의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 이 교훈들이 많은 국민들의 일상 생활속에서 친숙하게 같이 살아간다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도 좋아지게 될 것이다.

 

 

최부자 가문은 부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여 많은 기여를 했으며 특히 가문의 전재산을 다 투여하다시피 하여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 대학이 구() 대구대학교로 나중에 청구대학교와 합쳐져 영남대학교로 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을 위한 재단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최부자집은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몇 년전 대구에서 최부자 종친회가 억울하게 빼앗긴 영남대 재단을 찾기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대구지역 시민 단체와 함께 최부자 종친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영남대를 빼앗긴 억울한 사연에 대해 설명하고 영남대 재단을 다시 최씨 종가로 되돌려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서명 작업도 받는 것 같았고 소송도 불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지금은 그 일이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사나 인사(人事)는 반드시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되어야 한다.

최부자집이 나름대로 분수를 지키고 사회적 책무도 성실히 다하여 인심을 잃지 않고 유지해오면서 우리나라의 부자로서 좋은 본보기가 된 것은 정말 중요한 역사적 전통이자 성과이다.

이 가문이 자신들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부자로서 모범적인 처신을 해왔듯이 대학도 되찾아 그만큼 모범적으로 운영해간다면 또 하나의 좋은 사립대학 전통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또는 손님들과 함께 여러차례 최부자집을 찾으면서 올 때마다 집터의 평안함과 육훈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고 좋은 느낌을 받았는데 영남대학교 사연을 알고 나서는 이 좋은 가문에 대학을 되찾는 사필귀정의 경사(慶事)가 하루 빨리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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