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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구한말에도 '거류민 보호' 내세웠다

기사승인 2015.10.18  17: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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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동학군 북상하자 출병…경복궁 점령-청일 전쟁 도발

황교안 국무총리가 최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일본 자위대 입국을 허용하는 듯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황 총리는 지난 14일 새정치연합 강창일 의원이 "한국에 3만7,000여 일본 거류민이 살고 있다. 혹시 이들이 유사 시 신변에 위협이 될 때 일본이 한반도에, 한국에 진출하려 할 때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자 “일본과의 협의 결과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될 때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답변했다.

황 총리의 발언은 즉각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다음날 "우리 측 요청이나 동의 없이 일본 자위대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정부의 기본적 입장이고, 이건 변함이 없다"고 전날 발언을 수정했다. 국방부도 거들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한반도 안보 및 국익에 영향을 미치는 일본의 군사활동은 우리의 요청이나 동의 없이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황 총리와 국방부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진의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총리의 정리되지 않은 발언 속에 우리 정부의 의중이 숨어있질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120년전 구한말에도 일본이 거류민 보호를 위해 1만 명의 대군을 몰고 와 한반도를 유린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일본 자위대가 지난 2월 15일 태국 우타파오 해군 항공기지에서 실시한 해외 자국민 대피 훈련. /연합뉴스

 

동학군 발발하자 日 “거류민 보호를 위해” 출병

1894년 4월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교주 전봉준이 지휘하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수세를 체납한 빈농을 처형한데 격분해 일어난 민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흽쓸며 번져갔다. 동학군은 관군을 패퇴시키고 연전연승하며 고창·나주·정읍등지를 함락하고 5월말에[ 전주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다급해진 민씨 정권은 고종에게 청국에 신하를 자청하며 출병을 요구하도록 종용했다.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고종은 하는수 없이 청나라에 군을 출동해달라고 요청했다.

청나라 군벌 이홍장은 고민했다. 1885년 텐진조약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할 때 서로 통보하기로 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 의해 청이 출병하면 일본도 출병할 것이 분명하므로,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투를 치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홍장은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원세개에게 일본의 의도를 타진하도록 지시했다. 원세계는 일본 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때 일본 공사관 서기생 정영방은 교묘하게 속여 원세개를 안심시켰다. 그는 청국이 군대를 파견해 조선의 내란을 평정하더라도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약간의 출병에 만족한다고 했다. 일본은 국내가 다사다난해 출병의 여유가 없고, 출병하더라도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하는데 그칠 정도로 소수병력만 파병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세개는 이 말을 믿고 베이징의 이홍장에게 전보로 보고했다.

당시 일본 총리는 나중에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였다.

 

거류민 보호에 필요한 병력의 수십배를 출병

일본은 청국의 출병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선수를 쳤다. 그해 6월 2일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고 조선출병에 관한 건을 의결했다. 각의 의결이 있던 날 저녁 무쓰 무네미쓰 외상은 외무차관, 참모차장과 비밀 회의를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회고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적으로 매듭을 짓느냐는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 내 승리하느냐”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면 500~1,000명의 병력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쓰 외상은 청국보다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6,000~7,000의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이토 총리에게 보고했다.

청국의 이홍장이 두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을 향하도록 명령한 것은 일본 각의 결정후인 6월 4일이었다. 병력은 2,800명이었다.

그때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는 “조선에서 일어난 변란은 중대한 사건이므로, 일본도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청국에 통보했다. 6월 10일 일본 육군 400명이 군함을 타고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입하겠다고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조선정부는 고관을 인천에 급파, 일본군의 서울진입을 중지하도록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서울 입성을 강행했다.

전주를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동학군은 청·일 양국군이 출병하자 정부와 화의를 하고 전주에서 철수했다. 청과 일본에 침입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청의 원세개와 일본의 오도리 공사는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군대 증파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어떻게든 청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어 조선을 먹겠다는 야욕에 불탔던 도쿄의 수뇌부는 당황했다. 그들이 고안해낸 꾀는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군대를 증파하겠다는 것. 6월 16일 일본의 무쓰 외상은 도쿄 주재 황봉조 청국 공사를 불러 이 안에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날 일본은 1만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청군의 4배에 해당하는 대군이었다.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겠다고 시작한 일본의 출병은 거류민 보호에 필요한 병력의 10~20배나 불어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동학혁명 121주년을 기념하는 사진 공모전을 개최해 녹두대상에 이정희 씨가 출품한 '함성'을 선정했다. /연합뉴스

 

미국은 중립 표명하며 적극적 개입 피해

그런후 일본은 말을 바꿨다. 무쓰 외상은 6월 22일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금후 청국이 어떤 방향을 취하든지, 일본은 단독으로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는 내용을 청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도쿄 정부는 어떻게든 개전의 구실을 만들라고 조선 주재관들에게 훈령을 내렸다.

고종의 조선정부는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워싱턴에 파견된 이승수 공사는 6월 22일 미국의 월터 그레샴 국무장관을 만났지만, 미국은 중립임을 표명할뿐 적극적인 개입을 피했다. 미국은 극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외교 언사로써 그 입장을 모면하려고 할 뿐이었다.

일본은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했고, 조선정부는 내정간섭을 거부했다.

그러자 7월 23일 일본군 2개 대대는 경복궁에 침입했다. 조선 경비병이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작전 30분만에 궁을 점령했다. 일국의 왕궁이 30분만에 점령된 경우는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군의 기습적인 경복궁 점령으로 서울에 주재하던 청의 원세걔는 변장을 해 청으로 도망갔다.

경복궁 점령후 이틀후인 7월 25일 일본군은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하고, 29일에는 성환에서 3,000여명의 청국군을 선제공격해 격멸했다. 그리고 8월 1일자로 선전포고했다. 야비한 수법이다. 러·일전장과 미국과의 태평양 전재엥서도 일본은 선전포고에 앞서 기습공격을 하는 수법을 썼다.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낸 일본군은 동학군 진압에 나섰다. 그때 조선의 농민 수십만명이 일본군 총칼에 도륙당했다.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고 출병한 일본군은 조선의 수많은 조선 백성을 살상하고, 조선을 수중에 넣고 말았다.

▲ 청일전쟁(중국명 갑오전쟁) 발발 120주년을 맞은 지난해 7월 중국 북해함대 소속 군인 400여 명이 '치욕'의 현장이었던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 류궁다오(劉公島)에서 기념의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또다시 거류민 보호 명분으로 자위대 파병론 제기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한 자위대 파병은 일본의 기본 방침이다.

지난 1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 한국내 일본인 대피방안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한국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 일본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인 대피 방안과 관련한 협의를 하자고 한국 측에 실무 차원에서 요구를 해왔지만 한국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협의를 거부하는 배경으로 경색된 한일관계, 사안의 민감성 등을 거론했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한반도에 체류중인 일본인의 보호나 피난이 필요한 경우를 상정해 평소부터 부처 간에 다양한 준비 행위와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도 여러 협력에 대해 폭넓은 의견 교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국회가 집단안보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일본은 전쟁을 할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놓았다. 주타깃은 중국과 북한이 될 게 분명하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은 우리 정부의 동의 없이 자위대를 우리 영해나 영공에 파병시킬 가능성은 열려 있다. 북한이 도발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미군함정이나 미군기가 발진해 한반도로 향할 것이고, 이를 엄호하기 위해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나 항공자위대 전투기들이 우리의 영해나 영공까지 들어올수 있다. 또 한국 거주 일본인의 보호·철수를 위해 유사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있어 제3국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존중을 명확히 명기시했으므로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함에 있어 우리 측의 요청 또는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고 못 밖고 있다. 하지만 일본 개정법안에는 ‘주권 존중’이라는 추상적 단어만 나열돼 있을뿐 동의절차에 대한 구체적 규정은 없다. 자기네들이 법을 애매하게 만들어놓고, 유사시에 근거 규정이 없다고 군사개입을 할 경우 충돌을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은 앙숙과도 같은 한일 관계를 중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한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미국의 중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입장으로선 중국과의 군사 헤게머니싸움에 우위의 입장에 서려면 우방인 한·일 두나라가 화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말을 돌이켜보면 입장이 난처해질 때 미국은 애매한 중립의 위치를 유지했다. 일본이 무슨 명분을 내걸고라도 한반도 유사시에 군사개입을 할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오는 20일 서울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 사이에 한·일 국방장관회담이 열린다. 이번 회담에서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위해 유사시 자위대 파병안건이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그 회담에서 한 장관은 “만의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경우, 우리 군이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고, 우리 함대로 일본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럴 정도의 국력을 지난 120년 사이에 쌓아 두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일본의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명의의 '마사카키'로 불리는 공물이 바쳐져 있는 모습. /연합뉴스

김인영 발행인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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