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오늘] 핵 물질 끝까지 숨긴 카다피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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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오늘] 핵 물질 끝까지 숨긴 카다피의 최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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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에 42년 철권 통치 무너져…핵 포기 약속하고도 숨겨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23년간 장기 집권한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튀니지의 국화 재스민의 이름을 따서 재스민 혁명이라 불렸다.

이듬해인 2011년에 아랍의 시민혁명 바람이 이웃나라 리비아에 불어 닥쳤다.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카다피는 시민 반군을 미사일과 화학무기로 살육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들끓자 유럽 나토군이 시민군에게 전투기를 제공했다. 시위 발발 8개월 만인 10월 20일, 카다피는 고향 시르테의 땅굴에 숨어 있다가 시민군에게 총살됐다.

 

▲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무아마르 카디피 전 국가수반 /위키피디아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 1942 ~ 2011).

1969년 9월 27일 김정은 집권 때와 같은 나이인 27세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쿠데타에 성공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반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골격으로 아랍 단일국가 건설을 주창했다.

리바아는 카다피의 쿠데타에 앞서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지만, 카다피의 쿠데타로 미뤄지다가 1975년 이 조약을 비준한다.

카다피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화학무기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가지고 있어야 미국과 유럽에 대항하고 이스라엘을 추방하고 아랍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라 믿었다.

그는 집권하자 바로 WMD 확보에 나섰다. 1970년대초 그는 해외 암시장에서 핵무기를 구입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카다피 정권에 대해 테러지원국이라고 비난하면서 경제제재를 단행했다. 1986년 카다피는 미국 팬암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켜 270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미국을 넘어 유엔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카다피의 거처가 확인되면 즉각 폭격에 들어가 카다피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은채 유랑생활을 했다. 동시에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 확보에 더욱더 열을 올렸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체재가 와해되자 카다피는 기댈 곳이 없어졌다. 카다피는 빌 클린턴 행정부가 시작되는 1990년대초에 반미 노선과 범아랍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99년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겠다는 조건을 미국에 제의해 비밀협상을 벌였다.

곧이어 미국에 조지 W. 부시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피가 클린턴 정부 때와 같은 제안을 제의했는데, 부시 대통령의 답변은 “당신이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미국이 아무런 협의 없이 파괴하겠다”는 것이었다. 부시의 이 발언이 카다피로 하여금 핵 폐기로 돌아서게 했다.

 

2001년 미국에서 9·11사건이 발생하자, 카다피는 알카에다를 비난하며 미국을 지지했다. 곧이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알카에다를 토벌할 때, 카다피는 알카에다 잔당의 수색에 협조하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했다.

2003년 12월 19일 카다피는 전격적으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생화학무기와 핵무기를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리비아 외교부는 “그동안 많은 암거래 시장에서 핵 물질과 부품을 수입해왔다”고 시인하고, 모든 핵 원심분리장치를 미국 관리에게 이양하고 그동안의 공급자 명단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1월 24일 미군 수송기가 리비아에 도착해 핵 기술과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2만5,000톤 분량의 서류와 장비를 싣고 미국 테네시에 있는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가져갔다.

 

▲ 2004년 7월 12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테네시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를 방문해 리비아에서 수송해온 핵 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이를 계기로 리비아는 국제사회로 나오게 되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기도 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Saif al-Islam Gaddafi)은 “미국이 핵 포기의 대가로 안전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장차 미국과 군사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랍권에서는 카다피의 결정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리비아의 핵 포기로 인해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핵 주도권이 강화되었고, 미국의 선제적 공격의 정당성만 입증시켰다는 것이다.

카다피는 핵을 포기한 이후 서방세계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댓가를 바랐는데, 돌아온 것은 기대 이하였다. 게다가 미국과의 외교관계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미국은 남은 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압박했다.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지원, 외교관계 개선이 늦어지자 카다피는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던 중 2010년말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 민주화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닥쳐왔다. 리비아 국민들도 카다피의 독재에 항거했다. 시위는 초기에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었지만, 순식간에 불이 붙으면서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카다피는 공군을 동원해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2011년 3월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수시로 리비아를 공습해 반군 시위대를 지원했다. 유엔군의 공격에 이어 반군이 트리폴리를 압박했다.

 

▲ 서방 국가들이 설정한 리비아 비행금지구역 /위키피디아

 

카다피는 자발적 핵무기 폐기의 조건으로 체제를 보장한다고 했으니, 미국과 유럽에 공습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빠지자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와 지지자들은 핵 포기를 후회한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서방의 리비아 공습은 계속되었고,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키고 반군의 승리로 귀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았다. 42년 권좌의 끝은 죽음이었다.

카다피가 죽고 반군이 사바(Sabha)라는 지역을 점령해서 창고를 열어보았더니, ‘방사능’(radioactive)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수천개의 푸른색 통이 나왔고, IAEA는 그것이 ‘옐로 케이크(yellow cake, 우라늄 제련에서 생성되는 중간생산물)임을 확인했다. IAEA는 나중에 이를 회수했다. 리비아의 신정부는 2013년 800톤의 화학무기 원료를 폐기하고, 2014년 2월 나머지 화학무기를 폐기할 것임을 선언했다. 2016년에야 완전한 화학무기 폐기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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