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중에 연금개혁 미루다 봉변 당하는 푸틴
상태바
재임 중에 연금개혁 미루다 봉변 당하는 푸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24 1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년 동안 수술 기회 놓쳐…‘밑빠진 독’이 된 상황에 밀어붙이다 반발 사

 

토요일인 22일 모스크바 시내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모여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연금법 개정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붉은 깃발에 푸틴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의 사진을 그려 넣고 “인민의 적”이라고 쓴 포스터를 흔들었다. 공산당이 주도한 이날 행진에 시위자들은 “그들은 우리 호주머니를 노린다”고 외쳤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러면 차르(황제)라는 칭호를 얻으며 18년째 장기집권한 푸틴이 왜 ‘인민의 적’이라는 욕을 얻어먹으면서 연금 구조에 손을 댄 것일까. 푸틴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38%로 떨어졌다고 한다.

세금과 연금은 정치가에게 민감한 사안이다. 세금은 국민의 재산을 국가라는 통치기구가 가져가는 것이고, 연금은 국가가 중매해서 국민들이 낸 돈을 노후에 돌려주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국민들이 재산권을 박탈당할 경우에 약하게는 정치인의 지지율이 낮아지고, 심각할 때에는 정치적 변혁이 발생하기도 한다.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전쟁이 그런 경우다.

푸틴이 이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하지만 푸틴은 의회에서 연금법안이 제출될 때 그 초안을 한번 읽어보고 바로 승인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연초에 연임하면서 자신의 높은 지지율에 취했다고 볼수 있다.

푸틴은 2000~2008년에 4년 임기의 대통령을 두 번 연임하고, 2008년에 자신의 직계 드미트리 베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앉히고 실세 총리로 4년간 재임한 뒤,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려 2012년 대선에 승리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올해 3월 대선에서 푸틴은 다시 당선돼 새로운 6년 임기를 시작했다. 올해로 18년째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연금 개혁을 미뤘다. 미국의 인디펜던트지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연금개혁의 시도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반복되어 왔지만, 그때마다 연기되었다. 푸틴이 자신의 재임 중에 가급적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연금 개혁을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연초에 6년 임기를 새로 시작하면서 더 이상 개혁을 늦출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이후 서방의 경제제재가 가속화하고, 이에 따라 누적 재정적자가 커져갔다. 게다가 러시아인의 기대수명이 2010년대에 평균 3.7년 늘어나 연금생활자의 수도 급증했다. 러시아는 2차 대전때 독일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큰 인명손실을 보았고, 전후 탄생한 베이비부머들이 이제 고령화하면서 연금생활자가 당분간 증가하는 추세다.

모스크바 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러시아 국민연금(RPF: Russian Pension Fund)의 수입금이 5조 루블인데, 이는 전체 지출의 62%밖에 감당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적자분까지 합쳐 올해 연방정부가 3조 루블, 지방정부가 3조 루블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야 겨우 적자를 메울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언론들의 비유를 들자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 /그래픽=김현민

 

푸틴이 2024년에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연금개혁을 미룰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러시아 국민연금은 지난 4월 올해 기금의 적자가 당초 예상보다 두배 늘어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입이 줄고 지출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푸틴은 새로 임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지지율이 높을 때 연금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 같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6월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막되기 직전에 연금개혁안을 발표했다. 푸틴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왕과 나란히 경기를 관람하는 그 장면에서 러시아인들이 축구에 흥분하는 틈을 이용해 연금수령연령을 남성은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은 55세에서 63세로 각각 올리는 연금법 개정안이 발표되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이러다간 연금을 받아보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다는 주장이 러시아 국민들을 흥분케 했다. 여성들의 반발이 더 컸다. 남성은 연금수령연령을 5세 더 올리는데 비해 여성은 무슨 죄로 8세나 놀리느냐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이혼률이 높다. 10년 정도 살다가 헤어지는 것이 일상사라고 한다.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기에 남성에 비해 불공평하다는 목소리가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야당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소치 동계올림픽과 월드컵을 여느라 재정을 다 까먹고 국민연금을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크림반도 점령, 시리아 지원 등에 대한 비판 여론도 나왔다. 남의 나라 일에 쓸데 없이 개입하다가 국민들을 거덜냈다는 것이다.

 

▲ /그래픽=김현민

 

푸틴은 정치인이다. 이런 반발을 조기에 진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치생명에 큰 흠이 생긴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다. 결국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여성의 수령 연령을 당초 63세에서 60세로 낮추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남성 연령은 낮추지 않았다. 꺼낸 김에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다.

이 방안도 국민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푸틴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이달초에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연금개혁 반대 시위가 열려 1,000명이 구금되는 일도 벌어졌다.

 

▲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베드베데프(2008년) /위키피디아

 

푸틴이 연금개혁안을 제출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러시아 경제가 악화하면서 2014년 이후 국민소득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연금 개혁안을 내밀었으니, 러시아 국민들의 실망이 더 컸다는 것이다.

어쨌든 푸틴은 연금 개혁을 더 미룰수 없다. 모스크바 타임스의 분석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연금생활 고령자의 인구는 3,630만명으로 일자리를 갖고 있는 노동인구 7,260만명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런데 앞으로 연금생활자가 2024년까지 440만명(13.5%) 더 늘어나 연간 7,000억 루블 이상의 재원이 더 소요된다고 한다.

결국은 연금을 올리거나 수혜대상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푸틴은 재정이 허락하는대로 자신의 임기 중에 가급적 미봉책으로 연금개혁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에선 대통령 3연임을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연금개혁을 잘못할 경우, 푸틴은 3연임은커녕 정치적으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도 있다. 다른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나와도 연금 문제의 부담을 안게 된다. 차기 대권주자가 부상하는 2021년에 연금 문제는 러시아에서 핫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정치평론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