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 오늘] 세포이 항쟁에 무너진 무굴제국
상태바
[9/20 오늘] 세포이 항쟁에 무너진 무굴제국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9 17: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굴 마지막 황제, 반란군 지지하다 영국군에 체포…영국 직접통치로 전환

 

1857년 9월 20일 델리의 교외 후마윤 묘지(Humayun's Tomb)에 숨어 있던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가 영국군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되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는 72세였다. 이로서 몽골제국의 마지막 황제국인 무굴제국은 20대 330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종말을 고한다.

 

▲ 1857년 8월 20일 후마윤 묘지에서 체포되는 무굴제국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위키피디아

 

인도의 무굴제국(Mughal Empire)의 건국자 바부르(Babur)는 중앙아시아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티무르(Timur)의 5대손으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살의 나이에 바부르는 페르가나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왕국은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와 국경을 접하는 산악지대의 작은 부족국가였다.

그는 사마르칸트를 공격해 티무르의 꿈을 되살리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중에는 페르가나마저 빼앗기고, 남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했다. 1525년 인도 공격에 나서 이슬람 국가인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1525년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몽골이란 명칭이 페르시아어로 변형된 표현이다. 바부르는 징기스칸의 아들 차가타이계 후손임을 나라 이름에서 분명히 새긴 것이다.

무굴제국은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과 손자 악바르 1세 때 본격적인 영토 확장에 나서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최대영역을 형성했다.

하지만 15~16세기에 유럽 열강이 신항로를 개척해 인도 해안에 거점을 확보하고 침략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무굴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1757년 영국은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이후 인도 토후국들을 하나씩 흡수했고, 무굴 제국의 영토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 무굴제국 전성기 영역(17~18세기) /위키피디아

 

바하두르 샤 2세가 1837년 52세의 나이에 즉위할 때 무굴제국의 영토는 델리시 주변 일대로 축소되었다. 말이 황제였지, 인도를 통치할 능력이나, 군사력, 재력을 갖추지 못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황궁을 겨우 유지해나가는 실정이었다.

영국은 전통적인 분할지배정책(divide & rule policy)을 채택해 과거 무굴제국의 통치영역에 있던 수백개의 작은 왕국과 토후국을 독립시켜 영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 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바하두르 샤 2세는 황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세금을 걷어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시인이었다. 그는 철학에 관심이 깊고 승려처럼 생활했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주의(Sufism)에 심취해 있었다.

 

▲ 바하두르 샤 2세 /위키피디아

 

그런데 그의 재위 20년 되던 1857년에 인도인 용병을 중심으로 하는 세포이 항쟁이 터진다. 영국은 이를 세포이 반란이라 한다.

세포이(sepoy)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이르는 말이다. 이때까지 영국은 인도를 직접통치하지 않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통치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후 동인도회사는 영국군보다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해 인도와 주변국가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00년에 걸쳐 동인도회사는 인도 남부와 버마까지 지배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1857년에 인도에서 영국군의 수는 4만5,000명에 불과했고, 세포이 용병의 수는 20만명에 이르렀다.

 

반란의 원인은 다양하다. 가장 큰 원인은 뭐니뭐니 해도 영국의 강압적인 인도 통치였다. 영국인들은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인도의 문화를 무시하고, 인도인을 차별했다.

발단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했다. 1857년 1월 27일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지금은 콜카타) 인근에 주둔하던 세포이들이 새로 지급된 탄약통의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총은 신형 머스킷 총이었는데, 이 총은 병사들이 종이로 싼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탄약을 총신에 넣고 발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동물성 지방을 입혔는데, 그 지방이 인도인들이 싫어하는 소와 돼지의 지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세포이들은 탄약을 입에 물기를 거부했다.

단지 이 때문이라고는 볼수 없다. 기본적인 영국의 통치가 무자비했기 때문에 저항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세포이들의 반란은 파죽지세처럼 불붙었다. 그들은 갠지스강을 따라 인도 중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고, 5월 11일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를 점령했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종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바하두르 샤 2세를 적임자로 생각했고, 인도를 통일해 영국과 대항하기 위해 바하두르 샤 2세를 인도 황제로 추대했다.

 

▲ 1857년 세포이 항쟁 삽화(런던 뉴스) /위키피디아

 

다음날 바하두르 2세는 모처럼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했다. 5월 16일 황제는 세포이에 체포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을 지시했다.

처음엔 세포이 반란군의 기세가 우세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의 호소에 마라타 왕국 등이 참여하고, 일부 이슬람들이 지하드를 선언했다. 그에 비해 수니파 이슬람들은 봉기에 합류하지 않았고, 세포이 일부는 영국군 용병으로 남았다. 펀잡의 시크교도와 파슈툰족들은 영국 편에 서서 델리 탈환작전에 참전했다.

분열은 곧 패배다. 봉기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서아시아와 중국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의 반격은 잔인했다. 포로로 잡힌 세포이 수백 명을 세워 두고 대포를 쏘아 한꺼번에 처형시키는 살인극도 벌였다.

9월초 영국군은 델리 북부 능선에 집결해 공방전을 벌였다. 영국군도 사령관이 4차례나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9월 14일 영국군은 60문의 중포로 성문을 파괴하고 델리성을 점령했다. 황제는 델리 교외에 있는 후마윤 무덤에 숨었다. 하지만 곧 발각이 되고 9월 20일 영국군에 체포되었다.

다음날 영국군은 황제의 아들인 황자 미르자 무굴, 미르자 카지르 술탄, 그리고 손자인 미르자 아부 바크르를 즉결 처형했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의 머리를 잘라 황제의 앞에 가져와 보게 했다. 황제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델리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영국령 버마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멸망했다. 바하두르 샤 2세는 1862년 11월 7일에 유배지 양곤에서 사망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간접통치의 가면을 벗고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그 영토와 자산을 물려받았으며, 총독을 보내 식민지배를 본격화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