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 오늘] 만주사변 도화선, 류타오후 폭파 사건
상태바
[9/18 오늘] 만주사변 도화선, 류타오후 폭파 사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9.17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쿄 내각에 보고도 않고 관동군 수뇌부가 전쟁 도발 위해 사건 조작

 

이시와라 간지(石原 莞爾),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 征四郎), 혼조 시게루(本庄 繁).

이 세명의 일본 관동군 장교들이 모의해서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이다. 전쟁선포는 도쿄 내각의 승인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일단 만주의 관동군을 동원해 일단 전쟁을 일으키고, 나중에 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전쟁광들이다.

일본 육군대학 출신인 이들 세 주범은 과거 한국군의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각각의 역할을 보면 이시와라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아티가키는 관동군 고급참모, 혼조는 관동군 사령관이었다. 이 세 명의 고위급 장교는 일본 관동군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음모는 만주와 몽골을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만몽(滿蒙) 영유계획이었다. 이들은 전쟁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도쿄의 내각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라 만주에 대한 군사개입이 미온적이고, 현지 군사령부가 내각의 동의 없이 직접 전쟁을 도발하자는 것이었다.

세 주모자는 시나리오를 구성했다. 이 시나리오는 전후 전범재판에서 밝혀졌다.

거사 장소로 봉천(奉天, 지금의 센양(瀋陽)) 근교의 류타오후(柳条湖)로 정했다. 중국 만주군벌 장쉐량(張學良)의 주둔지가 근처에 있어 뒤집어 씌우기 좋았고, 이 곳을 장악하면 만주의 중심을 점령할수 있었다.

모의자들은 부하를 모아 구체적인 계획을 꾸몄다. 폭파전문가도 투입했다.

1931년 9월 18일 저녁, 봉천 대화(大和)여관의 관동군 사무실에서 사령관 혼조 시게루 대장의 주도 하에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만주 점령후 식민 통치 방법에 관해 격렬한 논쟁을 거쳐 구상해 두었다.

류탸오후 철도 폭파 시간은 그날 밤 22시 20분 경. 관동군 후스타이(虎石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가 실행했다. 대대장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는 1개분대를 봉천 북쪽 약 7.5 km 철도 지점에 1개 분대를 파견해 소형폭약을 장치한 후 폭파시켰다. 또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현장에 방치해 이 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삼으려 했다. 이를 류타오후 사건이라 한다.

 

▲ 만주 봉천(선양)을 침공하는 일본군 /위키피디아

 

철도 폭파후 관동군은 “중국 동북군이 철로를 폭파하고 수비대를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일제히 장세량의 동북군 북부 사령부를 향해 사격했다. 아울러 관동군은 동북군 사령부와 봉천을 공격했다.

관동군은 기습공격했고, 중국 동북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동북군 사량관 장셰량은 관동군의 확전 의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반격을 가하지 않고 부대를 철수했다. 1만명의 중국 동북군이 500명의 일본 관동국에 의해 격퇴당했다. 아니, 중국군은 무대응으로 철수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밝혀졌다. 일본에 포섭된 중국인 첩보원 진비후이(金璧輝)의 애인이자 첩보원이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가 도쿄 전범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면서 당시의 상황을 폭로했다. 그는 패전후 미군측에 붙어 동료로부터 배신자라고 욕을 얻어 먹었지만, 만주사변의 진상을 천하에 드러냈다.

전범 재판에 드러난 관동군의 전쟁 만행은 류타오후 사건에 앞서 여러차례 진행되었다.

그중 하나가 1928년 6월 4일에 발생한 만주군벌 장쩌린(張作霖, 장셰량의 아버지) 폭살사건이다. 봉천 교외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가던 장쩌린은 관동군이 고용한 암살자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사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봉쇄하기 위해 만주군벌 장쩌린을 지원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데 비해, 만주의 관동군은 차제에 장쩌린 군벌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며 도쿄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관동군의 모의도 도쿄의 내각이 모른채 진행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가 개입되어 있었다.

 

▲ 류타오후 사건 이후 일본군이 중국 동북군의 음모라고 제시한 동북군 군모, 소총, 불탄 철도 침목 등 /위키피디아

 

류타오후 폭파사건은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확전되었다. 만주 사변이라고도 한다. 만주의 중국 동북군은 20만명에 이르렀지만, 1만~3만여명에 불과한 관동군에 패해 만주 전역을 내주게 되었다.

이후 중국 베이징과 텐진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첩보원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나섰다. 그는 일본군 특무기관의 장으로 임명된 후 중국 군벌 장쩌린을 비롯해 만주인들과 연줄이 많았다. 그는 중국의 어떤 정치인이 매수 가능한지, 아편과 여자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첩보와 파괴활동을 지휘했다. 류타오후 폭파사건이 터지자 도이하라는 첩자 진비후이를 앞세워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선통제)를 만주로 데려가는데 성공했다.

1932년 3월 1일 일본 관동군은 선통제를 황제로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괴뢰정권이고, 실제 통치는 관동국이 주도했다.

 

▲ 만주국의 영역 /위키피디아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