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 지구에 있던 진자항(金家港)성당에서 김대건이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敍品)을 받아 조선인 최초로 신부가 되었다.
진자항 성당은 17세기 명나라 숙종 때 건립된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중국의 경제개발 바람 속에 2001년 3월 25일 미사를 마지막으로 헐리고, 2004년 6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복원됐다.
세레명은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 1821년~1846년)는 증조부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 10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옥사했고,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과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후 김대건은 귀국해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했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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