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백제 공격로에 수레바퀴와 짐승 발자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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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제 공격로에 수레바퀴와 짐승 발자국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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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문화재연구원, 옥천서 7세기 신라 관도(官道) 확인

 

도로는 고대국가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필수적인 요소다. 지방을 통치할 때도 도로를 먼저 뚫는다. 로마제국이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것도 그런 이유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는 과정에서도 도로를 뚫었을 것이다. 사서에는 도로건설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이 나오지 않지만, 상식에 해당하는 일이다.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발굴 조사중인 옥천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 부지 내 유적에서 7세기 신라 고대 도로를 확인했다. 이 조사는 작년 6월부터 올해 8월까지 진행되고 있다. 발굴현장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431번지 일원이다. 이 지역은 경부고속도로 인접한 곳이다.

 

▲ 옥천의 발굴현장 전경 /문화청

 

이번에 확인된 도로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며 산 정상부근 사면과 계곡부를 이어 조성된 것으로, 길이는 약 320m가 넘는다. 노면 폭은 약 5.6m에 달한다.

도로의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도로는 1886년경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목적으로 작성한 지형도에도 ‘소로(小路)’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 발굴 과정에서는 7세기 신라 토기·기와부터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백자 등이 나왔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도로는 신라에서 조선 전기까지는 교통과 군사상 도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발굴팀은 추정했다.

도로 외에도 청동기 시대 주거지‧구덩이(수혈)유구, 삼국 시대 토광묘, 고려 이후의 토광묘와 주거지, 조선 시대 토광묘‧구덩이‧도랑유구 등이 발견되었다. 고려 시대 청자 조각, 조선 시대 백자 조각과 청동 숟가락 등도 발견되었다.

 

▲ 발굴된 도로 전경 /문화재청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옥천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이 있던 곳으로, 관산성은 554년 신라가 백제 성왕이 이끄는 3만의 군사를 궤멸시킨 곳이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이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660년 백제 통합 전쟁 시에도 신라의 진군로에 자리한 군사 거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도로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고려할 때, 이 도로는 늦어도 7세기 이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관도(官道, 국가가 관리하는 도로)일 것으로 조사팀은 추정했다.

아울러 「삼국사기」 신라본기 671년 기록에 등장하는 보은·옥천 방면에서 대전을 거쳐 공주(웅진)에 이르는 신라의 중요 군량 운송로인 웅진도(熊津道)의 일부로 추정된다.

이 도로가 평지나 능선 사면부가 아닌 산 정상부근인데도 불구하고 직로로 개설된 것으로 보아, 가능한 한 직로로 만들어 군수물자를 쉽게 이동하려는 군사적 목적의 관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관도가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예는 대부분 서라벌(경주)과 그 인근으로, 서라벌과 지방을 연결하던 관도가 확인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번에 확인된 고대 도로는 왕경이 아닌 지방에서 신라의 관도가 확인된 최초의 예로서 주목된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각축지인 옥천 지역에서 조사된 고대 도로를 통해 신라 왕경과 지방을 연결하는 관도의 존재를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의 도로문화의 전모에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오는 20일부터 21일까지 오전 10시~오후 3시 사이에 현장 공개를 한다.

 

▲ 위는 수레바퀴 자국 모습, 아래는 수레를 끌었던 짐승 발자국 모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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