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5월의 이탈리아①…선입관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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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5월의 이탈리아①…선입관의 폐해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8.08.1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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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문화유산의 나라 이제야 보게 되었나” 뒤늦은 한탄

 

[조병수 프리랜서] 새해 들어 딸들 입에서 "로마를 가보고 싶다"는 얘기가 나올 때만 해도 그냥 흘려 들었다. 그러던 것이 어영부영 휴가날짜가 거론되더니, 덜커덕 5월 하순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부터 사버렸다.

그 바람에 느닷없이 고대로마문화나 르네상스 같은 묵직한 단어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막연히 귀동냥이나 해오던 남의 나라 이야기를 새삼스레 알아나가기도 만만치 않았기에, ‘다른 좋은 곳도 많을 텐데 뜬금없이 웬 이태리냐?’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 동안 역사면 역사, 문화면 문화, 영화나 요리에다가 마피아 이야기까지 숱하게 접해오면서도 내심 이태리라는 나라에 크게 솔깃하지 않았던 것은, 수십 년 전 어느 봄날의 아찔했던 기억 탓이 컸다.

 

예전에 런던에서 일하면서 여름휴가기간에 자동차로 로마까지 다녀오려고 나섰다가, 같이 길을 나선 친구가 제네바에서 화상을 입는 바람에 이태리 입성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는 주재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한나절 베니스를 둘러 보는 것으로 이태리여행에 갈음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한국 행 비행기를 타러 스위스 취리히로 간 김에, 이틀 밤을 차에서 새우잠을 자며 밤길을 내달리는 강행군을 한 것이다.

그때 밀라노 외곽을 거쳐서 베니스로 가는 도중에, 밤은 깊어지고 피곤해서 잠깐 눈이나 붙이려고 고속도로 길가 쉼터로 들어갔다가 잊지 못할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전조등 불빛에 쉼터 여기저기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이 보이길래 '한밤중에 이런 데서 무슨 모임을 하나?'싶을 정도로 조금은 의아했지만, 다들 나 같은 여행객들이려니 하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막 선잠이 들려는데, 사각사각 나뭇잎 밟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섬뜩한 기운에 누운 채로 고개만 살짝 들고 주변을 살펴보니, 어둠 속으로 잔뜩 웅크린 자세의 사내들이 마치 포위망을 좁혀오듯 사방에서 조심스레 다가서고 있었다.

옆자리 아내에게 “여기서 나가야겠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속삭이고는,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시동을 검과 동시에 상체를 일으켜 핸들을 잡으며 급 발진해 나갔다.

어느새 다가와서 차 안을 들여다보려다가 움찔 놀라 비켜서면서 일그러지는 얼굴들,

앞쪽에서 갑작스런 차의 움직임과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서 주춤거리는 사내들,

그들을 피해서 급히 핸들을 꺾을 때 "끼이이익"하는 바퀴 밀리는 소리,

그리고 백미러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운전석 의자를 곧추세우는 순간들이 마치 무슨 액션영화 장면들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깜깜한 밤길을 내달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이 야밤에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이국 땅 으슥한 길가에서 무슨 변고를 당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한참 동안 등골이 서늘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살금살금 다가왔는지 그 까닭이야 짐작할 수 없지만, 그런 숨막히던 순간의 기억에다가 암흑가의 스산한 영화들 분위기까지 덧대어지니까, 그만 그렇게 썩 내키지는 않는 나라로 자리매김되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호기심과 궁금한 것이 있고, 스파게티나 피자 같은 그 나라 음식을 즐길지언정 말이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딱 31년 전이다. 그래도 이왕에 가기로 했으니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이태리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태리와 이탈리아, 베니스와 베네치아, 플로렌스와 피렌체 같이 영어와 이탈리아어 표기에 따라 나라이름과 지명이 달리 쓰여지고 있는 것조차도 혼란스러운데, 남들이 남긴 여행기나 책들에는 극성을 부리는 소매치기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예전에 서유럽나라들로의 여행이 안전할 때도, 로마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주머니에 손이 쑥 들어오는 소매치기”에 관한 얘기들을 하곤 했다. 요즈음은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도 그런 피해를 입은 얘기들이 흔한 터이니, 이탈리아는 오죽하랴 싶었다.

더군다나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는 렌터카를 사용하기로 했는데, 차문을 부수고 가방을 통째로 훔쳐간다는 얘기들이 많아서 엄청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목걸이지갑에다 가방들을 연결해서 묶는 쇠줄(wire)과 자물쇠까지 준비하고, 렌트카의 보험가입조건은 차량도난 등 모든 손해를 담보하는 슈퍼커버(super cover)까지 추가했다.

그런데다가 이탈리아 주재원으로 있다가 온 옆집 부부로부터, “자동차 여행 때에는 도시마다 고대유적보호와 공해방지를 위한 교통제한구역(zona traffico limitato, ZTL)이란 것이 있는데, 멋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사진이 찍혀서, 들어갈 때 100유로, 나올 때 100유로, 하는 식으로 비싼 과태료를 물게 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더 큰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남부로 갈수록 위험하다”니 남쪽 아말피 해안지역은 현지 투어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자동차로 이동할 중·북부 지역은 도시마다 ZTL을 피해서 주차할 장소를 검색하고, 이동방법과 동선을 잡느라 고생께나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챙긴다고 챙겼지만, 막상 현지에서는 잠깐만 길을 잘못 들어도 느닷없이 나타나는 이 ZTL이라는 빨간색 동그라미 표지판 때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내비게이션이나 다른 앱으로는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차가 이동할 때는 온 가족에게 ZTL표지판을 살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자니 빨간 색 동그라미만 나타나면 “스톱! Zona다.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외침에 혼미해지기도 하고, 표지판 밑에 쓰인 이탈리아 글을 짐작이나 해보려고 차를 세웠다가 뒤따르던 운전자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간 제법 여러 나라에서 자동차를 몰아봤지만 이처럼 신경이 쓰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현지법규나 관련규정을 좀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간 탓이긴 하지만···.

 

▲ Siena 의 ZTL(교통제한구역) 표지판 /사진=조병수

 

어쨌거나 언제든, 어디로 가든, 여행은 설렘을 안겨준다. 드디어 이탈리아로 출발하는 날, 예약해둔 비행편의 탑승개시시간에 맞추어 탑승구로 가노라니, 항공사 직원들이 "탑승을 마감한다"고 재촉하며 뛰어다닌다. “시간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두르냐?”니까 "기장의 지시"라고 한다.

'성급한 것이 반도(半島)인들의 특성인가?'라는 생각을 해가며 서둘러 기내에 올랐더니, 실제 출발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버린다. “공항사정 때문”이라면서···. 그래도 이륙한다고 "의자 곧추세워라, 발 밑에 뭐를 두지 마라"고 돌아 다니면서 부산을 떨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든다.

"이륙 스탠바이"를 외치는 화끈한 음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영공들을 거치며 서쪽으로 10시간 가까이 날아가자, 아래로 아드리아해(海)가 보이고 우리 국토면적의 3배, 한반도의 1.36배나 된다는 이탈리아반도가 펼쳐진다.

파란 하늘에 피어 오른 뭉게구름과 여유롭게 펼쳐진 전원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항에서부터 로마 테르미니(Roma Termini)역을 거쳐서 호텔을 찾아갈 때까지,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린다는 곳들을 여행가방을 끌고 갈 일이 막막했다.

 

▲ 로마행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이탈리아 시골풍경 /사진=조병수

 

로마 피우미치노공항(Aeroporto di Roma-Fiumicino/Aeroporto intercontinentale Leonardo da Vinci)에 도착하면서부터는 괜스레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느라 마음이 바쁘다. 공항대합실에서 철도 표시를 따라 가는 길목에 열차표 자동판매기가 놓여있고, 그 앞으로 여행객들이 늘어서 있다. 거기서 30분이상을 기다려서 차표를 산 후에 열차 승강장 쪽으로 이동하니까, 그곳에 널찍한 대합실이 보이고 한산한 매표창구와 자동판매기가 널려있다.

공연히 날려 버린 시간이 아깝고, 아직도 그 자동판매기 앞에 줄 서있을 이방인들을 생각하니까 헛웃음이 절로 난다. 그 앞에 간단한 안내 말이라도 하나 붙여놓았으면 좋을 텐데···.

비행기 지연도착이 많다는 말이 있어 열차표 예매를 하지 않았지만, 현지에서 표를 구입하게 되더라도, 목마른 자가 샘을 파듯,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정보를 더 철저히 확인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 로마 피우미치노공항역 대합실 /사진=조병수

 

어느새 어둠이 내려 깔린 공항에서 도심의 테르미니역까지 직행하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Leonardo Express) 승강장에서는 사람들이 열차표에 펀칭하느라고 분주하다. “천공(穿孔)되지 않은 표를 가지고 승차했다가 검표원에게 적발되면 벌금”이라는 것을 모두들 어디선가 보고 들은 모양이다.

열차에서도 짐 싣는 구역 바로 앞에 있는 좌석을 고수했고, 테르미니역에 내려서 호텔까지 이동할 때도 주변에 누군가 따라붙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여정(旅程)에서의 화두(話頭) 역시 ‘주변 경계’였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대 테러경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몰리는 유적지나 주요관광명소(名所)마다 무장 군인이나 경찰관들이 장갑차 같은 차량과 함께 경계를 서고 있어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푸근했다는 점이다. 그런 분위기와 쉴새 없이 주변을 살핀 가족들의 노력 덕분에 무탈하게 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2주간 이탈리아의 정취에 푹 젖어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어쩌다 이런 문화유산, 이런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를 이제서야 와보게 되었나’라고 한탄하기에 이른다. 진작 그 깊이를 제대로 살펴볼 기회를 가졌더라면,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과 스스로의 부족함을 살피는 노력이 좀더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피어 올랐다.

눈감고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한밤중의 해프닝 하나로 오랜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섰던 나라에 대해서 선입관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했던 것이 안타깝다. 덕분에 그 동안 마주친 수많은 인연들과 일들을 단편적인 지식과 경험에 의한 섣부른 판단과 선입관으로 대하지나 않았나 돌아보게도 되었지만···.

괜히 로마 가자고 해서 늦깎이 공부시킨다며 투덜거리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꺼번에 많은 느낌과 깨임을 선물로 안겨준 ‘5월의 이탈리아’가 그렇게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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